소음과 징조
스튜디오의 공기는 건조했고, 어딘가 오래된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듯한 미세한 잡음이 섞여 있었다. ‘압도적 재미 쇼’라는 타이틀은 짐짓 경쾌했지만, 그 이면에 깔린 주제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진행자는 마이크 앞에 앉아 특유의 덤덤하면서도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명 말씀드렸죠. 부동산으로 흔들어 제끼고, 그다음은 경제라고."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언론의 헤드라인은 온통 '국가 부도'라는 불길한 네 글자로 도배되어 있었다. 코스피가 4천을 바라본다는 희망 섞인 전망 따위는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환율이 오르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목소리들. 진행자는 그 소음들 사이에서 분노하기보다는, 그저 기묘한 현상을 관찰하는 생물학자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율 때문에 부도난다고 난리더군요.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안 돼서, 이런 걸로는 화내지 않습니다. 듣고 납득하면 수긍하고, 화가 올라오면 그때 화내죠."
그의 소개와 함께 세 명의 남자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 라이브의 긴장감을 즐기는 듯한 김원장 기자, 미디어의 행간을 해부하러 나온 이봉우 연구원, 그리고 자신을 ‘공부 노동자’라 칭하는 경제학 박사 이건우. 그들은 마치 재즈 트리오처럼 각자의 악기—데이터와 논리—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근데 기자님, 그 헤어스타일, 녹화가 아니라 라이브로 그냥 가시는 겁니까?"
"라이브로 갑니다. 시청자분들은 다 녹화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희는 모든 게 생방이죠."
김원장 기자의 농담 섞인 대답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웃음기는 금세 사라졌다. 이봉우 연구원이 들고 온 기사 뭉치 때문이었다.
1997년의 유령과 3,500억 달러
이봉우 연구원이 먼저 낡은 신문지 조각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일보의 헤드라인, <3차 외환위기 조짐>. 마치 이재명 정부가 고의로 나라를 절벽으로 몰고 가는 것처럼 묘사된 기사였다. 기사는 최근의 고환율과, 한미 관세 협상으로 인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근거로 들며 재정적자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97년의 악몽을 억지로 소환하는 굿판 같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으니, 이제 국내에 달러가 씨가 말라 외환위기가 올 거라는 논리죠."
그 말을 들은 김원장 기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은 메마른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짧고 건조했다.
"사람들이 숫자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97년 IMF 때 우리가 빌린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고작 210억 달러였습니다."
스튜디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210억 달러. 국가의 존망을 걸고 치욕적인 각서를 써야 했던 그 금액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돈, 요즘 현대차 조지아주 공장에 5년 동안 투자하는 금액과 비슷합니다. 기업 하나가 쓰는 돈이 그때 국가 전체가 없어서 망했던 돈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한국 경제를 여전히 70년대, 80년대 수준으로 착각합니다."
김원장 기자는 답답하다는 듯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 경제의 규모를 '이탈리아', '캐나다', '호주', '스페인'과 비교했다. 심지어 스페인과 호주는 한국보다 뒤에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신주쿠 이세탄입니다. 매출이 3조 원이죠. 어떤 분들은 한국 백화점 매출이 몇천 억 수준일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반포 신세계 백화점 매출이 3조 원입니다. 일본보다 더 커요. 그런데도 저들은 여전히 우리가 베네수엘라가 된다는 낡은 주문만 외고 있죠."
그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이념처럼 굳어버린 사고방식이었다. 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인식은 과거의 향수에 묶여 있는 셈이었다.
1조 달러의 방패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공부 노동자' 이건우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데이터만을 신뢰하는 학자였다. 그가 제시한 그래프는 97년과 현재를 잔인할 만큼 명확하게 대조하고 있었다.
"97년에는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 받을 돈보다 많았습니다. 그러니 '돈 갚아'라는 말 한마디에 나라가 휘청거렸죠. 하지만 작년 말 기준으로 한국은 순대외금융자산이 1조 달러에 달합니다."
1조 달러. 그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다 갚고도 남는, 순수하게 해외에 쌓아둔 자산이었다. 이봉우 연구원이 덧붙였다.
"게다가 외환보유고도 4,300억 달러나 있죠. 조선일보는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면 망한다고 하지만, 그 돈은 생돈을 뜯기는 게 아닙니다.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굴려서, 거기서 남는 이익금으로 투자하는 거예요. 창고에 달러를 쌓아두기만 하면 아까우니까요."
"맞습니다. 마진콜이 오면 150억 달러든 200억 달러든 보내주면 되는 겁니다. 트럼프가 투자를 하라는데 '우리는 돈 없어서 못 해요'라고 할 겁니까? 차라리 백악관 앞에서 시위라도 하라고 하세요."
김원장 기자의 일갈에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론을 부추기는 자들은, 정작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환율, 연금, 그리고 침묵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고환율 이슈로 흘러갔다. 환율이 1,480원을 넘나들던 날, 언론은 외환당국이 침묵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국민연금을 동원해 환율을 방어하는 것을 두고 '연금 고갈'의 공포를 조장하기도 했다.
"외환 시장은 거대한 전쟁터입니다. 정부가 '나 4,750원에 막을게' 하고 패를 까는 순간, 투기 세력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 조정)'을 하는 거죠. 침묵이 아니라 신중함입니다."
김원장 기자는 국민연금 동원설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것은 '동원'이 아니라 '스와핑'이었다.
"국민연금이 뉴욕 빌딩을 사려고 합니다. 1조 원이 필요하겠죠. 그 돈을 달러로 바꾸려고 서울 외환시장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환율이 튑니다. 그러니 정부가 말하는 겁니다. '우리 외환보유고에 있는 달러 빌려줄게. 나중에 갚아.' 그러면 국민연금은 시장에서 환전을 안 해도 되고, 환율은 안정되죠.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경제적 조치입니다. 지난 정부도, 그 전 정부도 늘 해왔던 일이에요."
이건우 박사 역시 거들었다. 그는 '금리 역전' 때문에 자본이 유출된다는 공포 또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금리가 높다고 돈이 다 빠져나갈까요? 환율 변동을 고려하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이창용 총재도 말했죠. '금리 차이가 자본 이동을 불러온다는 이론은 없다'고요. 상식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현실 데이터는 다릅니다."
건전 재정의 배신
그들의 대화는 이제 지난 시절의 그림자, 윤석열 정부의 경제 성적표로 향했다. 보수 언론이 그토록 찬양했던 '건전 재정'이라는 간판 뒤에 숨겨진 참혹한 적자.
"330조 원."
김원장 기자가 툭 내뱉었다.
"돈을 아낀다더니, 3년 동안 330조 원 적자가 났습니다. 세수 예측도 실패해서 80조 원 가까이 펑크를 냈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소비입니다. 소비 동향 지수가 12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기자 생활하면서 이런 그래프를 본 적이 없어요."
이봉우 연구원은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프레임을 상기시켰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이 연극까지 하며 조롱했던 그 시절, 사실 경제 성장률은 5%에 달했다. 반면 '경제를 살리겠다'던 윤석열 정부의 성적표는 처참했다.
"해방 이후 한국 경제 성장률이 1% 밑으로 떨어진 적은 딱 다섯 번입니다. 오일쇼크, IMF, 금융위기, 코로나. 그리고... 윤석열 정부."
앞선 네 번은 세계적인 재난이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는 달랐다. 멀쩡한 날씨에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김원장 기자는 이것을 'GDP 킬러'라고 불렀던 외신의 평가를 인용했다.
절벽 위로 끌어올리며
"아바타 영화 보셨습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을 다시 끌어올리는 장면이 있죠. 지금 우리 경제가 딱 그 꼴입니다."
김원장 기자가 비유를 들었다. 누군가 밀어버린 경제를, 겨우겨우 팔을 뻗어 끌어올린 상태. 다행히 3분기 성장률은 1.3%를 기록하며 반등의 신호를 보였고, OECD는 내년 한국 성장률을 2.2%로 내다봤다.
"독일, 영국 다 0%대인데 우리는 1.3%로 버텨냈습니다. 절벽에서 끌어올려진 사람이 이제 막 다리에 힘을 주고 서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묻습니다. 왜 빨리 뛰지 못하냐고. 왜 비틀거리냐고."
스튜디오의 조명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안도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진동이었다. 진행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방송을 마무리했다.
"여기가 절벽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군요. 절벽에서 사람을 밀어버린 자들이, 이제 와서 구조가 늦다고 타박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기묘한 세상입니다."
방송이 끝나고 마이크가 꺼졌다. 하지만 스튜디오 안에는 여전히 그들이 쏟아낸 말들이 부유하는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경제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결국 그 숫자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공포,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의 속삭임이었다. 밤은 깊었고,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위태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1,480원의 환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