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명함에는 대표이사라고 적혀 있다. 회의실에서 당신은 말한다. 결재판에 사인을 한다. 가끔은 직원들 앞에서 철학을 논한다. "힘 있는 자가 힘을 쓰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는 건 똑똑한 판단이지."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쉰다.
근데 당신, 솔직히 알고 있지 않나. 그 명함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Chapter 1 권한 없는 자리의 무게
대주주는 따로 있다. 진짜 결정은 다른 곳에서 난다. 당신은 그 사람이 직접 나설 수 없어서 세워진 사람이다. 법적으로, 형식적으로, 대표라는 타이틀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 자신도 포함해서.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진짜 권한은 없는데, 대표라는 타이틀은 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첫째, 자신의 역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둘째, 권위를 연기한다.
Chapter 2 철학이 없는 자리에 철학을 채울 때
권위를 연기하는 데는 도구가 필요하다. 가장 손쉬운 도구가 철학인 척하는 말들이다.
"돈 없고 배운 게 없으면 저렇게 된다."
"힘 있는 자가 힘을 쓰는 건 자연의 이치야."
"서울대 애들이 그래도 한국 사회를 이끈 건 사실이잖아."
이 말들의 공통점이 보이나. 전부 기존 위계를 정당화하는 말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 이유가 있고, 강한 자는 강할 자격이 있고, 배운 자는 더 가치 있다는 논리.
왜 이런 말을 하게 될까. 그 위계 안에서 자신이 위쪽에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진짜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그 위계 논리로 덮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대표야. 대표는 위야. 위는 옳아." 이 등식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
Chapter 3 시스템 순응의 민낯
당신은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건 맞다.
군사독재 시절엔 독재를 정당화했을 것이고, 민주화 이후엔 민주주의를 정당화했을 것이고, 지금은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다음 시대가 오면 또 그 시대의 강자를 정당화할 것이다.
이걸 유연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단어는 따로 있다. 원칙 없음이다.
원칙 없는 사람은 시스템에 최적화된다. 그리고 시스템이 나쁠수록 그 안에서 더 편안하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니까. 그냥 흐름을 읽고, 강한 쪽에 붙고, 그것을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부른다.
Chapter 4 주변 사람들이 지쳐가는 이유
진짜 대표는 틀린 결정을 내려도 책임을 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따른다.
당신은 틀린 결정을 내려도 책임지지 않는다. 진짜 권한이 없으니까. 그러면서 권위는 행사하려 한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지친다. 책임 없는 권위만큼 피곤한 것도 없거든.
Epilogue: 진짜 대표의 조건
이 글을 읽고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을 잘 들여다보길 바란다. 철학이 없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철학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게 문제다. 권한이 없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권한 없이 권위를 행사하는 게 주변을 힘들게 하는 거다.
지강헌이 왜 그렇게 됐는지를 "돈 없고 배운 게 없어서"라고 배웠다면 — 이제는 다시 물어봐야 한다. 그 사회가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당신이 지금 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명함에 적힌 타이틀이 당신을 만들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책임을 지고, 어떤 사람을 대하느냐가 당신을 만든다. 그게 진짜 대표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