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에서 어린이 수만 명이 죽었다. 병원이 폭격당했고,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 대피소가 불탔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에 집단학살 우려를 제기했고, 수십 개국 정부가 규탄 성명을 냈다. 이것은 한쪽의 주장이 아니다. 팩트의 목록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앞에서 조용하다. 아니, 조용한 것을 넘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오히려 날을 세운다. "편향된 시각"이라고, "반이스라엘 선동"이라고.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한인 단체 대표는 대통령의 인권 발언을 공개 비판했다. 국내 극우 기독교 인사들도 비슷한 언어를 구사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학살 앞에 침묵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공모다.
Chapter 1 두 가지 이유, 그리고 그 한계
그들이 이스라엘을 감싸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의 '선민' 신학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에는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는 논리. 다른 하나는 생존 환경 보호 — 이스라엘에 살거나 그곳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취하는 입장.
두 가지 모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선민 신학의 문제는 단순하다. 신이 선택했다고 해서 학살이 면죄되지 않는다. 성경 안에서도 하나님은 선택한 민족의 죄악을 가장 엄하게 다루었다. 선택이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선택받았으니 무엇을 해도 된다"는 논리는 신학이 아니라, 신학의 탈을 쓴 편가르기다. 예수가 가르친 핵심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였다면, 폭격으로 죽어가는 가자의 어린이들도 그 이웃이다.
생존 환경 보호의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이스라엘에 사는 것, 이스라엘과 사업을 하는 것,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로 보편 인권에 대한 발언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신앙도 윤리도 아닌 거래다. 그리고 그 거래를 마치 도덕적 입장인 것처럼 포장할 때, 문제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 공적 해악이 된다.
Chapter 2 보편 인권이란 무엇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민간인 학살에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이다. 그 발언을 "외교적 결례"나 "반이스라엘 선동"으로 비판하는 것은, 학살보다 외교적 체면을 더 중히 여긴다는 고백이다.
Chapter 3 역사는 늘 물어왔다
역사는 늘 물어왔다 —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냐고.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앞에서 침묵했던 유럽의 교회들이 훗날 받은 질문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우리도 살아야 했다"고, "그들이 먼저 도발했다"고 대답한 역사가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가자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은 하마스가 아니다. 텐트촌에서 굶어가는 노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들은 그냥 사람이다. 그 사실 앞에서 신학을 꺼내고, 외교를 꺼내고, 생존을 꺼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Epilogue: 당신이 믿는 신은
당신이 믿는 신은, 정말 그 침묵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