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어느 즈음이면 회사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혼잣말처럼 북한 이야기를 한다. 어제 본 탈북민 유튜브에서 들었다는 이야기들. 평양 어느 동네의 소문, 김씨 일가의 내부 균열, 탈북 루트의 근황.
본인은 천주교인이라 말하지만, 주말마다 아내와 처가를 따라 서울의 한 대형 교회에 간다. 설교대에서 흘러나온 언어가 알고리즘을 타고 집으로, 다시 사무실로 흘러든다.
Chapter 1 동방의 예루살렘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해방 전 기독교의 중심은 북쪽이었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고, 1945년 이후 공산 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남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영락교회를 비롯해 지금의 대형 교회 계보 상당수가 그 흐름에 닿아 있다.
그들에게 반공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었다. 피난과 사별의 경험,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었다. 신앙과 반공은 한 몸처럼 얽혔고, 박정희 시대 국가의 반공 드라이브와 교회는 자연스러운 동맹이 되었다. 그 정서가 수십 년을 거쳐 지금의 대형 교회 정체성으로 굳었다.
교인들에게 탈북민의 이야기는 단순한 뉴스가 아니다. 자기 공동체가 돈과 기도로 밀어주고 있는 사역의 현장이다. 대표가 그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내와 처가가 거기 있고, 주 1회 설교가 있고, 교회 모임에서 흘러나온 링크를 알고리즘이 증폭시킨다.
정체성은 중립 지대에 두었지만, 정보 환경은 이미 깊이 들어가 있는 상태. 한국의 중년 남성에게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그림이다.
Chapter 2 어느 쪽도 남는 장사가 아닌 주제
흥미로운 건 비대칭이다. 보수, 특히 기독교 보수는 북한을 현재진행형으로 다룬다. 김씨 일가를 실명으로 호명하고, 내부 처형과 숙청 소식을 실시간으로 소비한다.
반면 진보 진영은 북한을 거의 괄호에 친 채 다루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김정은을 비판하면 보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 같고, 옹호하면 종북 소리를 듣고, 어느 쪽도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래서 "평화", "교류", "한반도 정세" 같은 추상어만 돌고, 사람들은 점점 북한을 "다른 나라"로 감각한다.
일상 대화에서 북한이 구체적 인물과 사건으로 반복 등장한다면,
그건 거의 예외 없이 보수·기독교 네트워크의 시그널이다.
Chapter 3 어디에 선을 긋느냐의 문제
여기서부터 나는 다른 질문에 부딪혔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정당한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고 간섭할 권리가 있는가. 나는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베스트팔렌 이래 근대 국제질서의 기본은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개입의 결과는 대개 좋지 않았다. 이라크,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남은 것은 폐허였다. 제재 역시 체제는 무너뜨리지 못하고 민간인만 조였다는 비판이 쿠바의 60년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이 원칙을 끝까지 밀고 가면 난감한 질문이 남는다. 르완다의 100일이 내정이었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독일의 내부 문제였나. 여기서 '보호책임(R2P)'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주권은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논리가 또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 되었으니, 순환이 계속 돈다.
사우디는 괜찮고 이란은 안 되고, 이스라엘의 가자 작전엔 무기를 대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제재한다. 도덕의 언어로 자국 이익을 포장하는 일은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Chapter 4 원칙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러다 나는 내 판단을 돌아봤다.
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는 미국이 개입해 막아주길 바랐다.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길 바랐다. 이란 내부에서 히잡 시위가 번졌을 때는, 국제사회가 조금은 도와주길 바랐다.
겉보기에 일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누가 더 짓밟히고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외부의 군사적 침공은 반대하고, 내부의 시민 저항은 지지하는 축이 있었다. 원칙이 없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원칙으로 모든 상황을 재단할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판단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약점이 아니다. 문제는 바뀐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바뀌는지 자기도 설명하지 못할 때 생긴다.
Chapter 5 거리를 둔다는 것과 비웃는다는 것
그래서 대표의 탈북민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는 이제 그 이야기에 반응하지 않는다. 반박하지도 동조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의 생태계에서 세상을 본다. 아내와 처가와 교회와 알고리즘이 함께 빚은 풍경이다. 나 역시 내 생태계에서 세상을 본다. 내가 보는 뉴스, 내가 읽는 책, 내가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나의 풍경을 그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감각을 진짜로 유지하려면, 내 판단 역시 내 생태계의 산물이라는 서늘한 자각을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문장을 입으로만 외우고 속으로는 "내가 맞고 쟤가 틀렸다"를 깔고 간다. 그 깔림은 결국 표정과 말투에서 새어 나온다.
직장에서 정치, 종교, 북한 — 이 세 가지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낫다. 일로 엮인 관계에서 세계관까지 맞출 필요는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무반응이 냉소가 되지 않도록만 조심하면 된다. 거리를 둔다는 것과 속으로 비웃는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성숙이고 후자는 위선이다.
Epilogue: 각자의 춤
조르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대장,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춤을 추고 너는 네 춤을 춰라.
음악이 다른 걸 가지고 싸우지 마라."
사무실 한쪽에서 대표가 오늘도 북한 이야기를 흘린다. 알고리즘이 밤새 그의 귀에 쌓아둔 이야기, 주말 예배에서 흘러나온 여운, 처가의 저녁 식탁에서 오간 단어들이 뒤섞인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이 어느 발원지에서 흘러왔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나에게도 내 발원지가 있다. 내가 밤늦게 열어본 피드, 아침에 스친 기사 한 줄, 오래전 읽은 책의 한 문장. 그것들이 섞여 내 오늘의 판단을 만든다. 대표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라, 흘러든 물줄기가 다른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모니터로 돌아온다. 반박도 동조도 하지 않는다. 각자의 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