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눈을 뜨기 전에 엄지를 먼저 움직였다.
베개 밑에서 휴대폰이 잡혔다. 밤새 살을 맞대고 잔 작은 짐승처럼 뜨뜻했다. 손바닥에 붙는 온기가 묘했다. 사람 살 같지는 않고, 식은 계란 껍데기 안쪽 같았다.
화면이 켜졌다.
푸른빛이 방 안을 핥았다. 천장 모서리에 붙은 먼지, 바닥에 뒤집힌 양말, 책상 밑에 구겨 넣은 편의점 봉투, 싱크대 안의 냄비. 전부 잠깐씩 들켰다가 다시 제자리로 숨었다.
알림이 열아홉 개.
빨간 점들이 앱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꼭 진드기 같았다. 작고 둥글고 피를 빨기 좋게 생긴 것들. 민재는 그 점들을 하나씩 눌렀다. 누를 때마다 화면이 열리고, 남의 아침이 쏟아졌다.
하얀 접시.
노란 소스.
얇게 썬 아보카도.
커피잔 옆에 놓인 책.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
반쯤 보이는 손목시계.
문장도 붙어 있었다.
오늘도 나답게.
민재는 코를 킁킁거렸다.
자기 방에서는 어제 밤 라면 냄새가 났다. 냄비 바닥에 국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고춧가루가 검붉은 딱지처럼 눌어 있었다. 젓가락 끝에는 불은 면발 한 올이 말라서 구부러져 있었다. 싱크대 배수구에서는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세제 냄새와 라면 국물 냄새와 젖은 수건 냄새가 뒤엉켜 방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다.
화면 속 접시에는 냄새가 없었다.
그게 더 깨끗해 보였다.
민재는 다시 넘겼다.
공항 라운지.
호텔 침대.
바다 앞 발끝.
새 아파트 거실.
와인잔 너머 야경.
헬스장 거울 앞 복근.
책상 위 노트북과 만년필.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엄지 끝이 유리 위를 미끄러졌다. 슥, 슥, 슥. 마른 뱀이 비닐 위를 기어가는 소리 같았다.
그때였다.
화면 위에서 투명한 자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처음에는 금이 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눈금이 있었다. 1센티, 2센티, 3센티. 아주 가는 눈금들이 사진 위에 겹쳐졌다. 접시에도, 공항에도, 거실에도, 바다에도. 투명한 자는 화면 속에만 있지 않았다. 민재의 방까지 삐져나왔다. 침대 길이를 재고, 냄비 지름을 재고, 양말의 구겨진 각도를 재고, 민재의 얼굴 위로 올라왔다.
눈 밑 0.7센티.
턱수염 1.2밀리.
입술 갈라짐 세 줄.
머리카락 눌린 자국 두 군데.
민재는 눈을 비볐다.
자는 동안 눈곱이 굳어 속눈썹끼리 붙어 있었다. 손톱 밑에 노란 때가 끼어 있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손톱이 반질반질했다. 민재는 엄지를 숨겼다. 그런데 숨긴 손가락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톱 끝의 거스러미가 이불 천에 걸렸다.
띵.
알림음이 울렸다.
작은 소리였다. 그런데 귀 안쪽에서 금속 바늘이 튕기는 것처럼 울렸다. 민재는 목을 만졌다. 투명한 줄 하나가 목둘레를 감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데 피부가 먼저 알았다. 삼킬 때마다 목젖 근처가 긁혔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등에 붙어 있던 티셔츠가 찌익 하고 떨어졌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발바닥에 먼지가 붙었다. 그는 싱크대로 가서 냄비에 물을 틀었다. 수돗물이 냄비 바닥을 때리자 말라붙은 국물 딱지가 떨어져 나갔다. 붉은 조각들이 물 위에서 몇 번 돌다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그걸 보는데 휴대폰이 또 울었다.
띵.
민재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화면 위에 자기 얼굴이 떠 있었다. 푸석한 눈, 마른 입술, 씻지 않은 머리. 화면이 꺼져 있을 때만 자기 얼굴이 나왔다. 켜져 있을 때는 남의 접시와 남의 바다와 남의 침대가 자기 자리를 차지했다.
민재는 손을 닦지도 않고 휴대폰을 집었다.
물 묻은 손가락이 화면에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 아래로 어제 올린 사진이 보였다.
카페 창가였다. 커피잔은 반듯했고, 햇빛은 컵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민재의 손목시계도 사진 한쪽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었다. 사실 그날 그는 세 번이나 손 위치를 바꿨다. 시계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면 촌스러웠고, 너무 안 보이면 찍은 보람이 없었다. 컵 옆에 책도 놓았다. 읽던 책은 아니었다. 집에서 표지만 보고 가져간 책이었다.
사진 밖에서는 아이가 울었다.
커피 머신이 김을 토했다.
옆자리 남자가 코를 훌쩍였다.
민재는 커피값을 내고 남은 잔액을 계산했다.
집에 오는 길에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샀다.
현관에 앉아 신발도 벗지 않고 먹었다.
김이 잇몸에 달라붙었다.
밥알 두 개가 바지 위로 떨어졌다.
사진 안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댓글이 달려 있었다.
여유 있네.
분위기 좋다.
요즘 잘 지내는 듯.
민재는 그 문장들을 오래 봤다. 눈으로 보면 글자인데, 혀에 올리면 종이 맛이 날 것 같았다.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종이.
그는 댓글 하나에 답을 달았다.
그냥 뭐.
전송을 누른 뒤 바로 지웠다.
다시 썼다.
고마워.
전송했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손바닥이 축축했다. 화면에는 손금 모양의 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 손바닥이 지나갔다는 증거. 그런데 몇 초 뒤, 화면이 어두워지며 자국도 같이 죽었다.
민재는 세수를 했다.
물은 차가웠다. 얼굴에 닿자 턱 밑 수염 사이로 물방울이 걸렸다. 수건에서는 덜 마른 냄새가 났다. 오래 접힌 천의 냄새. 햇빛을 못 본 냄새. 그는 수건을 얼굴에 대고 한참 서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젖은 섬유 냄새가 콧속 깊이 들어왔다.
방 안에서 휴대폰이 또 울렸다.
띵.
그 소리는 이상했다. 자꾸 작아지는데 더 깊이 들어왔다.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갈비뼈 안쪽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민재는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멈췄다. 거울은 얼룩져 있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문지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민재는 머리카락을 눌렀다. 눌러도 한쪽이 다시 섰다. 그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자기 얼굴을 봤다.
카메라 속 얼굴은 조금 나았다.
피부가 매끈해지고, 눈 밑이 옅어졌다. 턱선도 조금 또렷해졌다. 화면 속 민재가 화면 밖 민재보다 두 시간쯤 더 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필터 이름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이름도 거짓말을 잘했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 골목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두 굽 소리가 보도블록을 두드렸다. 도시락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오토바이 배달통에서는 기름 냄새와 뜨거운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건물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며 담배 연기를 밀었다. 민재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걸었다.
모두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검은 판들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마치 얇은 칼을 한 자루씩 들고 걷는 사람들 같았다. 칼날은 남을 찌르지 않았다. 저마다 자기 얼굴 쪽으로 향해 있었다.
민재는 국밥집 앞에서 멈췄다.
간판은 기름때로 누렇게 변해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돼지뼈 끓인 냄새가 얼굴을 쳤다. 들깨가루, 다진 마늘, 오래 끓은 고기, 젖은 앞치마, 바닥 세제, 김치 국물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냄새가 너무 두꺼워서 입술에 닿는 것 같았다.
혼자 앉았다.
테이블은 끈적했다. 손바닥을 올렸다 떼자 살갗이 늦게 떨어졌다. 벽에는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가격 위에 흰 종이를 덧대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 선풍기 망에는 먼지가 회색 털처럼 감겨 있었다.
국밥이 나왔다.
뚝배기 안에서 국물이 끓었다. 흰 김이 올라와 속눈썹을 적셨다. 민재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를 켰다.
화면 속 국밥은 못생겼다.
기름방울은 지저분했고, 파는 제멋대로 떠 있었고, 뚝배기 가장자리에는 국물이 넘친 자국이 있었다. 민재는 각도를 바꿨다. 위에서 찍고, 옆에서 찍고, 숟가락을 걸치고 찍고, 깍두기 접시를 당겨서 찍었다. 그래도 아니었다. 화면 속 국밥은 끝내 뜨거워 보이지 않았다. 냄새도 없었고, 입천장을 데울 힘도 없어 보였다.
국물이 식고 있었다.
민재는 카메라를 끄고 숟가락을 넣었다.
첫 숟가락이 혀를 때렸다. 뜨거운 기름이 입천장에 붙었다. 파 냄새가 코 뒤쪽으로 올라왔다. 고기 조각은 질겼고, 밥알은 조금 퍼져 있었다. 깍두기를 씹자 신 국물이 어금니 사이로 튀었다. 민재는 눈을 찡그렸다. 땀이 관자놀이에서 내려와 귀 옆으로 흘렀다.
그때 옆자리 남자가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탁.
민재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주방에서는 국자가 솥 벽을 긁었다.
척, 척, 척.
가게 밖에서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부아아앙.
누군가 기침했다. 누군가 휴지를 뽑았다. 누군가 "여기 깍두기 더요" 하고 외쳤다. 소리들이 민재 주변에 앉았다. 아무도 다듬지 않은 소리들이었다. 잘라내지 않은 소리들이었다. 배경음악도 아니고 효과음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들.
민재는 밥을 계속 떠 넣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와이셔츠 안쪽이 젖었다. 입술에는 기름이 묻었다. 그는 휴지로 닦지 않았다. 한 숟가락 더 떴다. 국밥 속에서 고기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회색이고, 삐뚤고, 사진으로는 쓸모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씹으니 고기 냄새가 났다. 씹어야만 나는 냄새가.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울렸다.
띵.
민재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또 울렸다.
띵.
그는 숟가락으로 뚝배기 바닥을 긁었다. 바닥에 붙은 밥알들이 떨어졌다. 소리가 났다. 긁히는 소리. 오래 들으면 이빨 안쪽까지 시린 소리.
식당을 나왔을 때, 낮빛이 눈을 찔렀다.
민재는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손등에서 국밥 냄새가 났다. 파와 돼지기름과 마늘 냄새. 그는 그 냄새를 맡으며 회사 쪽으로 걸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은 계속 무거웠다. 작은 쇳덩어리 같았다. 허벅지에 부딪힐 때마다 툭, 툭, 소리가 났다.
오후 내내 민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메일 창이 열리고 닫혔다. 누군가 메신저로 파일을 보냈다. 키보드 소리가 비처럼 내렸다. 타닥타닥타닥. 민재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꾸 휴대폰 쪽으로 눈이 갔다.
검은 화면.
그 안에 천장 조명이 비쳤다. 조명은 흰 뼈처럼 길었다. 화면 모서리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민재는 엄지로 닦았다. 닦을수록 더 번졌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는 다시 앱을 열었다.
사람들이 어깨를 맞댄 채 서 있었다. 젖은 머리 냄새, 겨드랑이 데오드란트 냄새, 오래 신은 구두 냄새, 지하철 쇠 냄새가 섞였다. 손잡이는 미끈했다. 누가 잡았는지 모를 손의 기름이 남아 있었다.
화면 속에는 눈 덮인 산이 나왔다.
누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글에 햇빛이 박혀 있었다. 장갑 낀 손으로 브이를 하고 있었다. 민재는 그 사진을 보다가 지하철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창에는 자기 얼굴뿐 아니라 뒤에 선 사람들의 얼굴도 겹쳤다. 눈, 코, 입, 마스크, 이어폰, 모자, 광고판 글자가 한데 섞였다.
갑자기 투명한 자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화면 밖에서 나왔다. 지하철 창문 위로, 사람들 이마 위로, 민재의 가슴 위로. 눈금들이 움직였다. 누가 더 멀리 갔는지, 누가 더 비싼 것을 먹었는지, 누가 더 넓은 곳에 사는지, 누가 더 얇은 허리를 가졌는지. 숫자 없는 눈금들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민재는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목에 걸렸다. 넥타이가 갑자기 조였다. 그는 손가락을 넣어 매듭을 조금 풀었다. 셔츠 깃 안쪽에 땀이 차 있었다. 피부가 따가웠다.
그는 앱을 닫았다.
그러자 화면이 검게 변했다.
검은 액정 속에서 민재가 민재를 봤다.
눈을 피하려 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지하철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도 검어졌다. 유리 전체가 거대한 액정처럼 변했다. 객차 안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비쳤다. 다들 손에 작은 검은 판을 들고 있었다. 고개는 숙어져 있었다. 목덜미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도살장 앞에 선 짐승들처럼.
민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비었다.
비자마자 손가락들이 갈 곳을 몰라 서로 비볐다. 엄지 끝이 검지 마디를 긁었다. 손톱 끝에 살이 조금 일어났다. 그는 그 거스러미를 뜯었다. 따끔했다. 피가 아주 작게 맺혔다. 빨간 점 하나. 앱 모서리에 붙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문을 열자 방 냄새가 그대로 있었다. 식은 라면 냄새는 옅어졌지만 배수구 냄새가 남아 있었다. 빨래 건조대에는 양말들이 굳어 있었다. 바닥에는 아침에 밟은 먼지가 그대로였다. 냄비는 엎어져 있었고, 그 끝에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민재는 불을 켜지 않았다.
창밖 간판 불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빛, 푸른빛, 흰빛이 벽 위에서 번갈아 움직였다. 방이 잠깐 술집이 됐다가, 약국이 됐다가, 모텔 복도가 됐다.
휴대폰이 울렸다.
띵.
민재는 주머니에서 꺼냈다.
알림이 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카페 사진에 댓글을 달았다.
사는 거 멋지다.
민재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그때 방 안 어딘가에서 얇은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처음에는 쥐인 줄 알았다. 그는 숨을 멈췄다. 다시 들렸다. 사각. 사각. 책상 위 영수증이 창문 틈바람에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였다.
편의점 영수증 세 장.
삼각김밥.
컵라면.
캔커피.
민재는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 종이는 얇고 거칠었다. 손끝에 마른 가루가 묻었다. 그는 카페 사진을 다시 봤다. 하얀 컵, 손목시계, 책, 햇빛. 그리고 손에 든 영수증을 봤다. 종이 위 숫자는 작고 검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숫자였다.
그는 댓글창을 열었다.
사는 거 멋지다.
그 아래에 답을 쓰려 했다.
아니야.
썼다가 지웠다.
그냥 그래.
썼다가 지웠다.
손가락이 멈췄다.
민재는 휴대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에 전원 끄기 표시가 떴다. 손가락이 잠깐 허공에서 떨렸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눌렀다.
화면이 죽었다.
방 안에서 제일 밝던 것이 꺼지자, 냉장고 소리가 커졌다. 웅— 하는 낮은 소리. 수도관 어딘가에서 물 흐르는 소리. 윗집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밖에서 취객이 침을 뱉는 소리. 민재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들었다. 전부 전부터 있던 소리였다. 다만 방금 막 이사 온 것처럼 낯설었다.
그는 휴대폰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 안에는 오래된 볼펜, 고장 난 이어폰, 동전 몇 개, 약 봉투, 편의점에서 받은 나무젓가락이 있었다. 휴대폰이 그 사이에 들어가자 툭 하고 둔한 소리가 났다. 작은 관 뚜껑을 닫는 소리 같았다.
민재는 운동화를 신었다.
끈을 묶는데 손끝이 서툴렀다. 매듭이 한 번 풀렸다. 다시 묶었다. 현관문을 열자 복도 공기가 눅눅했다. 오래된 시멘트 냄새, 세제 냄새, 누군가 끓이는 된장국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위층에 있었다.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12.
13.
14.
민재는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갔다.
난간은 차가웠다. 손바닥에 쇠 냄새가 묻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탁. 탁. 탁.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셔츠 안쪽의 열기가 빠졌다. 무릎이 조금 떨렸다. 발바닥에 양말 솔기가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얼굴을 물었다.
골목은 젖어 있었다.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아스팔트가 눅눅했다. 편의점 앞 쓰레기봉투에서는 단 우유 냄새와 썩은 과일 냄새가 올라왔다. 담배꽁초들이 배수구 근처에 몰려 있었다. 가로등 밑에는 날벌레들이 돌고 있었다. 빛에 부딪히고, 떨어지고, 다시 올라가고, 또 부딪혔다.
아무도 그것들을 찍지 않았다.
그래도 벌레들은 제 몸을 던졌다.
민재는 골목을 걸었다. 손이 자꾸 주머니 쪽으로 갔다. 휴대폰이 없었다. 허벅지를 치던 쇳덩어리도 없었다. 주머니 안은 헐렁했다. 손가락은 빈 천만 만졌다. 그는 손을 빼서 코트 주머니 바깥에 내려놓았다.
세탁소 앞을 지났다.
유리문 안쪽에 비닐 씌운 셔츠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사람 없는 몸들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이 사각거렸다. 얇은 칼로 밤껍질을 벗기는 소리였다. 민재는 그 앞에서 멈췄다. 비닐에 자기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길게 늘어나고, 찌그러지고, 다시 붙었다.
그 얼굴은 필터를 몰랐다.
눈 밑 자국도 그대로였고, 입술도 말라 있었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까 검은 액정 속 얼굴보다 덜 갇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얼굴이 흔들렸다. 흔들리니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민재는 다시 걸었다.
큰길 쪽에서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쇠가 이를 가는 소리.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전자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삐, 삐, 삐. 사람들은 건넜다. 민재도 건넜다.
그는 아무 데도 올릴 수 없는 밤 속으로 들어갔다.
사진으로 찍으면 검게 뭉개질 골목.
냄새가 먼저 도착하는 시장 입구.
간판 불빛에 끈적해진 보도블록.
손등에 남은 국밥 냄새.
손톱 옆의 작은 피딱지.
발바닥을 밀어 올리는 차가운 땅.
민재는 걸었다.
목에 감겨 있던 투명한 줄이 어디선가 조금 느슨해졌다. 끊어진 건 아니었다. 아직 살갗 위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셔츠 깃 안에 넣고 목을 긁었다. 손톱 끝에 땀과 때가 묻어 나왔다.
그는 그걸 봤다.
그리고 손을 털었다.
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재는 조금 더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