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현관 앞 우산꽂이에서 녹슨 물 냄새가 올라왔다.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산 끝마다 누런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찍어 봤다. 손끝에 쇠가 묻었다. 혀에 닿기도 전에 입안 깊은 곳에서 피 맛이 번졌다. 오래된 못을 씹은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구청에서 온 봉투가 누워 있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밤새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마이넘버 카드 갱신 안내. 검은 글자들이 흰 종이 위에 줄지어 박혀 있었다. 알을 깐 벌레들 같았다. 해가 뜨자 그 글자들이 조금씩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어버이날이었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야 했다. 돈은 용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사실은 손바닥 한 번 잡아 주지 못한 자식이 보내는 얇은 가죽 조각 같은 것이었다. 봉투에 넣어 건네면 지폐에서 사람 냄새라도 났을 것이다. 손때, 장판, 커피, 담배, 세탁비누, 그런 것들이 돈 사이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숫자 몇 개가 바다를 건너야 했다.
숫자는 냄새가 없다. 냄새 없는 것들은 가끔 사람을 속인다.
아내는 싱크대 앞에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물은 틀어 놓은 채였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스테인리스 바닥을 때렸다. 탁탁탁탁. 같은 자리만 파고드는 작은 곡괭이 소리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샴푸 냄새와 약 냄새가 같이 흘렀다.
"이비인후과 갔다 올게."
그녀는 휴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휴지 끝이 젖어 투명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 앱을 열었다. 화면은 부드럽게 열렸다. 아주 친절한 척했다. 비밀번호를 넣으라 했다. 인증을 하라 했다. 다시 확인하라 했다. 수수료가 붙는다고 했다. 처리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공휴일에는 늦어질 수 있다고 했다.
공휴일.
그 단어가 화면 한가운데 작은 돌처럼 놓여 있었다.
한국에선 손가락 하나면 됐다. 쏜다. 들어왔다. 끝. 돈이 허공을 건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띠링. 그 짧은 소리에 사람은 밥을 먹고, 물건을 사고,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덮었다.
여기서는 돈이 출발해도 도착하지 않는다.
돈은 중간 어디선가 멈춘다. 은행 건물 지하인지, 서버실의 차가운 공기 속인지, 공휴일이라고 적힌 캄캄한 창고 안인지 알 수 없다. 내 통장에서 빠져나간 숫자가 어머니 통장에는 닿지 못한다. 빠져나갔는데 도착하지 않은 것. 그것은 돈이 아니라 실종자다.
나는 앱을 닫았다.
구청부터 가야 했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 공기가 코 안쪽을 긁었다. 도로 옆 배수구에서는 젖은 먼지 냄새가 났다. 자전거 브레이크가 멀리서 끼익 울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튀김기름 냄새와 커피 냄새가 번갈아 쏟아졌다.
구청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줄이 있었다. 백화점 명품 매장도 아니고, 콘서트장도 아니고, 늙은 회색 건물 유리문 앞에 사람들이 발끝을 모으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류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고, 누군가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었다. 외투들에서는 장롱 냄새가 났다. 오래 접혀 있다가 오늘 아침 억지로 끌려 나온 천의 냄새. 파스 냄새. 젖은 마스크 안쪽의 침 냄새. 늙은 가죽가방의 먼지 냄새.
아홉 시가 되자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 빠지는 욕조 구멍처럼, 구청은 사람을 삼켰다.
나는 번호표 기계로 손을 뻗었다.
"먼저 작성하세요."
창구 안쪽 여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얇고 단단했다. 플라스틱 자로 손등을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손을 거뒀다.
탁자 위에는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신청서. 확인서. 동의서. 위임장. 같은 얼굴의 종이들이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나는 볼펜을 집었다. 볼펜 끝은 처음부터 말라 있었다. 종이에 힘을 주자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이름을 썼다.
주소를 썼다.
생년월일을 썼다.
전화번호를 썼다.
같은 주소를 또 썼다.
다시 이름을 썼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종이에게 여러 번 증명해야 했다. 종이는 믿지 않았다. 기계도 믿지 않았다. 창구도 믿지 않았다. 나라가 내게 준 번호조차 나를 믿지 않았다.
옆자리 할머니는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한 글자씩 박아 넣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손등 혈관은 말라붙은 강줄기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가 글자를 쓸 때마다 입술도 같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종이 위에서만 입이 움직이는 물고기 같았다.
서류를 다 쓰고 번호표를 뽑았다.
187번.
전광판은 142번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낮고 딱딱했다. 엉덩이뼈가 곧바로 플라스틱에 닿았다. 등받이는 사람을 받쳐 주지 않았다. 몸을 잠깐 묶어 두는 형틀 같았다.
앞줄 노인은 지팡이를 세워 두고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전광판이 울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삑. 고개. 삑. 고개. 삑. 고개. 자기 번호가 아니어도 그는 매번 들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은 자기 이름이 아닌 소리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벽시계의 초침은 열심히 움직였다.
가증스러웠다.
그놈은 움직이는 척만 했다. 사람은 제자리에 박혀 있는데, 초침만 부지런한 척 원을 돌았다. 한 바퀴를 돌고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또 한 바퀴를 돌고도 아무 문도 열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아직도 대기 중이야."
그녀의 목소리 뒤로 병원 대기실이 들렸다. 기침. 비닐봉지 바스락거림. 슬리퍼 끄는 소리.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 누군가 코를 세게 푸는 소리. 멀리서 아이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 텔레비전 속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몇 명 남았어?"
"몰라. 대기실 꽉 찼어."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막힌 코로 들어가는 숨은 찢어진 종이컵을 빠는 소리와 비슷했다.
"의사는 봤어?"
"아직."
전화를 끊고 전광판을 봤다.
151번.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번호표가 눅눅해졌다. 나는 그것을 접었다 폈다. 다시 접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났다.
옆자리 중년 남자는 서류봉투를 열었다 닫았다.
찍찍.
찍찍.
찍찍.
그 소리가 귀 안쪽의 살을 긁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어제 먹은 깨알 하나가 부서졌다.
구청 안에는 점심 냄새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근처 식당의 튀김기름 냄새였다. 오래 쓴 기름. 새우도 감자도 고기도 결국 같은 갈색으로 가라앉는 냄새. 사람들의 배가 조용히 울었다. 아무도 배를 누르지 않았다. 모두 번호표만 쥐고 있었다.
187번이 불렸을 때 나는 잠깐 내 번호를 알아듣지 못했다.
몸이 먼저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다. 무릎 뒤쪽에서 피가 다시 흐르는 느낌이 났다. 찌릿찌릿했다.
창구 직원은 내 카드를 받아 들었다. 컴퓨터를 두드렸다.
탁탁탁탁.
멈춤.
마우스 클릭.
멈춤.
옆자리 직원에게 물음.
뒤쪽 서랍 열림.
도장 찍힘.
다시 멈춤.
그녀의 손은 바빴다. 종이를 넘기고, 카드를 뒤집고, 모니터를 가리키고, 도장을 집었다. 손은 분주했다. 그런데 내 일은 조금도 앞으로 가지 않았다.
바쁜 손과 멈춘 일.
이 나라의 창구는 그렇게 생겼다.
마침내 직원이 말했다.
"오늘은 접수만 됩니다."
나는 그녀의 입을 봤다.
입술이 움직였고, 말이 나왔고, 내 속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
"오늘 끝나는 게 아닙니까?"
"다음에 다시 오셔야 합니다."
그녀가 종이를 내밀었다.
방금 프린터에서 나온 종이는 따뜻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았다. 종이는 사람 손보다 따뜻했고, 사람 말보다 차가웠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눈을 찔렀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끝났어?"
"접수만 했어."
"나도 끝났어."
"어땠어?"
"세 시간 기다렸어."
"진료는?"
"일 분."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은 금방 목 안으로 떨어졌다. 가래가 걸린 것처럼 낮게 끊겼다.
나는 역 앞 은행으로 갔다.
은행 앞에도 줄이 있었다. 줄은 살아 있는 긴 꼬리 같았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꼬리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ATM 앞에서는 노인 하나가 통장을 넣었다 빼고, 다시 넣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계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삐.
삐.
드르륵.
삐.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송금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이름을 입력했다. 은행명을 입력했다. 지점명을 입력했다. 계좌번호를 입력했다. 화면은 몇 번이나 물었다.
맞습니까.
정말입니까.
수수료가 붙습니다.
그래도 합니까.
처리가 지연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합니까.
나는 계속 눌렀다.
예.
예.
예.
예.
마지막 화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송금 예정일이 내일로 찍혀 있었다.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휴일 처리 상황에 따라 반영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
내 통장에서 돈은 빠져나간다. 그런데 어머니 통장에는 아직 닿지 않는다. 돈은 어디로 가는가. 바다 위인가. 전선 속인가. 은행의 닫힌 셔터 뒤인가. 서버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는가.
나는 송금을 눌렀다.
기계가 명세서를 뱉었다.
얇은 종이가 손바닥 위로 미끄러졌다. 빠져나간 돈. 수수료. 처리 예정일. 검은 잉크로 찍힌 말 없는 벌레들.
나는 명세서를 접어 지갑에 넣었다. 지갑 안에서 동전들이 부딪혔다.
짤랑.
그 소리만큼은 살아 있었다. 동전은 무게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허벅지를 때렸다. 떨어뜨리면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냈다. 사람은 그런 것을 믿는다. 손에 닿고, 냄새가 나고, 잃어버리면 허리를 숙여 찾을 수 있는 것.
은행 밖으로 나오자 붕어빵 냄새가 났다.
역 앞 작은 포장마차에서 팥이 끓고 있었다. 철판 틈으로 반죽이 넘쳐 갈색으로 타고 있었다. 설탕 탄 냄새가 공기 속에 끈적하게 발렸다. 나는 붕어빵 하나를 샀다.
주인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동전을 올려놓았다.
그의 손바닥은 검고 거칠었다. 동전은 그 위에서 잠깐 빛났다.
만약 내가 여기서 계좌이체를 하겠다고 했다면, 그는 나를 바라봤을 것이다. 철판 위 붕어들의 배가 터지는 동안, 내 휴대폰 화면과 자기 통장을 번갈아 봤을 것이다. 돈은 빠져나갔는데 도착하지 않고, 붕어빵은 식고, 뒤쪽 줄은 길어지고, 팥 냄새는 더 눌어붙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전을 쥔다.
종이를 접는다.
창구 앞에 선다.
번호표를 움켜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자주 사람을 세워 두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코에 넣은 약 냄새가 거실에 퍼져 있었다. 박하와 알코올과 플라스틱이 섞인 냄새였다. 식탁 위에는 구청에서 받아 온 접수증과 은행 명세서가 나란히 놓였다. 둘 다 얇고, 둘 다 사람을 이겼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 보냈어."
"그래? 아직 안 들어왔는데?"
나는 창밖을 봤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흰 셔츠 하나가 걸려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조금씩 흔들렸다. 누가 안쪽에서 아주 약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 들어갈 거야."
말하고 나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
그 말은 어머니에게 간 게 아니었다. 나한테 떨어졌다.
어머니는 밥 먹었냐고 물었다. 나는 먹었다고 했다. 사실 붕어빵 하나뿐이었다. 입천장에는 뜨거운 팥에 데인 껍질이 일어나 있었다. 혀로 건드리면 따끔했다.
전화를 끊고 명세서를 꺼냈다.
종이는 벌써 구겨져 있었다. 숫자들은 그대로였지만, 종이 귀퉁이는 땀을 먹고 물러져 있었다.
아내가 물었다.
"들어갔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형광등 빛이 그녀의 눈꺼풀 위에 희게 얹혔다. 냉장고가 웅웅 울었다. 수도관 어딘가에서 물이 한 번 꿀렁였다. 멀리 선로 쪽에서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낮게 밀려왔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았다.
오늘 하루 받은 것들을 펼쳐 놓았다.
구청 접수증.
은행 명세서.
병원 영수증.
약 봉투.
번호표.
종이들이 식탁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죽은 생선들 같았다. 눈도 없고, 피도 없고, 비늘도 없는데 비린내가 났다. 그 비린내는 코가 아니라 목구멍 안쪽에서 났다.
그것들은 전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오늘 움직였다.
걷고, 쓰고, 기다리고, 누르고, 서명하고, 지갑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번호표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187번.
작은 종이가 식탁 끝까지 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집힌 벌레처럼 보였다. 나는 줍지 않았다.
형광등이 낮게 떨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전거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익.
그 소리가 얇은 칼처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창구 뒤에서 도장을 기다린다. 은행 서버 안에서 공휴일이 끝나길 기다린다. 병원 대기실 낡은 의자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다.
사람만 늙는다.
밤늦게 휴대폰을 다시 봤다. 어머니에게서 새 문자는 없었다. 은행 앱도 조용했다. 화면은 검은 우물처럼 내 얼굴을 비췄다. 그 안에 눈 밑이 꺼진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어디론가 갔다 왔지만, 아직 아무 데도 도착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들어왔다."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글자 네 개가 휴대폰 위에 떠 있었다. 들어왔다. 그 글자들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제야 방 안의 공기가 조금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끓였다. 주전자가 달아오르며 쇠 냄새를 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뚜껑이 달달 떨었다. 수증기가 얇게 올라와 창문 쪽으로 갔다.
나는 컵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물 표면이 흔들렸다.
어제 빠져나간 돈이 어디선가 아주 늦게 숨을 쉬기 시작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