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Tech

더 빠른 인간

2026. 05. 20

Audio Book

민준은 아침 아홉 시 전에 이미 세 번 늙었다.

첫 번째는 출근하자마자 슬랙 알림 숫자가 147에서 213으로 튄 걸 봤을 때였다.

두 번째는 지라 보드에 새 티켓 열두 개가 추가된 걸 봤을 때였다.

세 번째는 팀장이 말했다.

"이제 AI 코딩 어시스턴트 전사 도입했으니까, 스프린트 처리량 두 배는 가능하겠죠?"

그 말은 질문처럼 생겼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제 내려둔 커피였다. 냉장고에 넣지도 않은, 산화된 검은 물. 혀끝에 쇠맛이 났다.

모니터 오른쪽 위에는 회사가 새로 붙인 생산성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오늘의 AI 활용률: 84% 코드 생성량: 3,412 lines 평균 PR 처리 시간: 11분 24초 컨텍스트 전환 횟수: 27회

컨텍스트 전환 횟수.

그 숫자가 제일 싫었다.

개발자가 하루에 몇 번 다른 일로 끌려가는지 세는 지표였다. 예전에는 그런 걸 아무도 세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 지쳐서 늙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치는 속도까지 숫자가 됐다.

숫자가 되면 관리자가 본다.

관리자가 보면 목표가 된다.

목표가 되면 인간은 거기에 맞춰 찌그러진다.

민준은 IDE를 열었다. 코드 에디터 오른쪽에는 회사 전용 AI가 붙어 있었다. 이름은 MUSE. 뮤즈. 창작의 여신이라니, 웃기는 이름이었다. 민준이 보기엔 그건 여신이 아니라 장기 매매상이었다. 머릿속 집중력을 조금씩 떼어 가고, 대신 그럴듯한 코드를 돌려줬다.

"뮤즈, 결제 실패 시 재시도 로직 추가해."

AI가 즉시 답했다.

"물론입니다. 기존 PaymentRetryService를 확장하여 지수 백오프 기반 재시도 로직을 구현하겠습니다."

코드가 쏟아졌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작업이었다. 요구사항을 읽고, 기존 코드를 뒤지고, 테스트를 짜고, 예외 케이스를 생각해야 했다. 이제는 40초면 초안이 나왔다.

처음엔 좋았다.

민준도 인정했다. 이건 진짜 대단했다. 귀찮은 보일러플레이트, 반복되는 DTO, 테스트 더미, API 문서 초안. 그런 것들은 AI가 순식간에 해치웠다. 개발자는 마침내 더 중요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두 달 동안은 그랬다.

그리고 회사가 깨달았다.

"어? 일이 빨라졌네?"

그다음부터 모든 게 무너졌다.

* * *

2 효율의 저주

오전 열 시, 전체 개발 조직 회의가 열렸다.

CTO 한도윤은 화면 한가운데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웃을 때마다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그래프를 믿는 얼굴이 됐다.

"여러분, 지난 분기 정말 훌륭했습니다. AI 도입 이후 PR 생성량 238% 증가, 배포 빈도 171% 증가, 장애 대응 초안 작성 시간 64% 감소."

화면에 막대그래프가 떴다. 초록색 막대들이 위로 솟구쳤다. 민준은 그 막대들이 사람의 갈비뼈처럼 보였다.

도윤이 계속 말했다.

"이제 우리는 더 적은 리소스로 더 많은 임팩트를 낼 수 있습니다."

더 적은 리소스.

민준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늘 이상했다. 회사에서 리소스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체로 인간이었다.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QA. 이름도 있고, 식성도 있고, 잠버릇도 있고, 병원 예약도 있는 사람들.

그런데 회의실 안에서는 전부 리소스가 됐다.

2026 Q3 목표 - 기능 출시 주기: 2주 → 3일 - QA 자동화율: 90% - 개발자 1인당 월간 티켓 처리량: 43개 - 야간 장애 대응 AI 초안 적용률: 95%

채팅창에 박수 이모지가 올라왔다. 민준은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그때 옆자리의 세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거 이상하지 않냐?"

민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가?"

"AI 쓰면 일이 줄어야 하는 거 아니야?"

민준은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기침에 가까웠다.

"너 제번스 역설 알아?"

"그게 뭔데?"

"증기기관이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쓰게 되니까 석탄 소비가 줄어든 게 아니라 더 늘었다는 얘기."

세영이 눈을 찡그렸다.

"그게 지금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민준은 모니터 속 초록 막대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석탄이 된 거지."

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 * *

3 티켓은 새끼를 친다

그날 오후, 민준의 업무 보드는 다시 갱신됐다.

완료한 티켓은 다섯 개였다.

새로 생긴 티켓은 아홉 개였다.

마치 미친 짐승 같았다. 하나를 죽이면 둘이 태어났다. 둘을 죽이면 다섯이 기어 나왔다. 예전에는 기획자들이 티켓을 만들 때도 어느 정도 조심했다. 개발 리소스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요구사항 하나에도 회의가 필요했고, 우선순위 조정이 필요했고, "이번 스프린트에는 어렵습니다"라는 말이 벽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 AI가 들어온 뒤 그 벽이 사라졌다.

"이건 AI로 금방 되지 않아요?"

그 말이 모든 회의의 끝에 붙었다. 검색 필터 하나 추가하는 것도. 관리자 페이지 하나 새로 만드는 것도. 레거시 API를 GraphQL로 감싸는 것도. 고객사별 커스텀 리포트를 만드는 것도. 모두 "AI로 금방"이었다.

AI는 금방 초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초안은 제품이 아니었다.

초안은 대충 맞는 척하는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을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개발자의 일이었다.

민준은 AI가 생성한 코드를 읽었다.

if (payment.status = 'FAILED') { retryPayment(payment) }

등호가 하나였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이 미친 놈아."

AI는 친절하게 답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건문에서 비교 연산자가 아닌 할당 연산자가 사용되었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AI는 사과를 잘했다. 아주 잘했다. 사람보다 잘했다. 문제는 사과한 뒤에도 또 비슷한 실수를 한다는 거였다. 무한히 예의 바른 신입 개발자. 피곤하지 않고, 월급도 적게 들고, 책임은 지지 않는 신입 개발자.

그 신입이 열 명 붙으니 민준은 시니어가 아니라 보육교사가 됐다.

코드를 쓰는 시간이 줄었다. 코드를 의심하는 시간이 늘었다.

하지만 회사 대시보드는 그런 걸 구분하지 않았다. 생성된 코드 라인은 증가했다. PR 개수는 증가했다. 티켓 처리 속도는 증가했다. 그래서 회사는 말했다.

"생산성이 향상되었습니다."

민준은 생각했다.

아니다. 생산성이 향상된 게 아니다. 소음의 생산량이 늘어난 거다.

* * *

4 밤의 배포

금요일 밤 11시 47분.

민준은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식은 된장찌개와 반쯤 마른 김치전이 있었다. 민준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슬랙 알림이 울렸다.

[긴급] 결제 재시도 로직 배포 후 중복 결제 발생

민준은 눈을 감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 눈을 뜨자 MUSE가 이미 장애 분석 초안을 띄우고 있었다.

"중복 결제의 가능한 원인은 멱등성 키 누락, 재시도 큐 중복 삽입, 외부 PG 응답 지연에 따른 타임아웃 처리 오류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과 충분한 말은 다르다.

민준은 로그를 열었다. 트랜잭션 ID가 반복되고 있었다. 재시도 로직이 실패한 결제를 다시 넣고, PG 응답이 늦게 오면 실패로 간주하고, 다시 넣고, 뒤늦게 성공 응답이 도착하고, 다시 성공했다.

한 사용자가 같은 물건을 세 번 샀다.

다른 사용자는 구독료가 다섯 번 빠져나갔다.

민준은 머릿속에서 코드를 역순으로 걸었다.

누가 리뷰했지? 나였다. 누가 머지했지? 나였다. 누가 AI 초안을 믿었지? 나였다.

그런데 정말 나였나?

민준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코드를 직접 쓴 기억이 없었다. 프롬프트를 던졌고, AI가 만들었고, 그는 수정했고, 테스트 일부를 통과시켰고, 알림이 쏟아져 다른 티켓으로 끌려갔다. 회의에 들어갔다. 슬랙 스레드에 답했다. 고객사 문의에 기술 코멘트를 달았다. 다시 돌아와 초록색 체크를 봤다.

그리고 머지했다.

그 사이에 그는 몇 번이나 사람이었을까.

몇 번이나 단순히 시스템의 손가락이었을까.

새벽 두 시가 넘어 장애는 막혔다. 환불 배치가 돌았다. 사과문 초안도 AI가 썼다.

"일부 고객님께 불편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민준은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회사는 AI로 장애를 만들고, AI로 사과했다. 그 사이에서 인간만 잠을 못 잤다.

* * *

5 석탄의 꿈

주말에 민준은 도서관에 갔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그냥 집에 있으면 계속 슬랙을 볼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도 손이 휴대폰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도서관 경제학 코너에서 그는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 석탄 문제. 번역본은 아니었고, 원서 일부를 엮은 책이었다. 민준은 영어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전부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효율적인 사용이 소비 감소와 같다고 착각하지 말라.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민준은 책장을 덮었다.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서관 유리창을 따라 물방울이 줄줄 흘렀다. 민준은 그 물방울을 보며 증기기관을 상상했다. 더 적은 석탄으로 더 멀리 가는 엔진. 사람들은 환호했을 것이다. 드디어 절약이 가능해졌다고. 드디어 여유가 생겼다고.

하지만 엔진이 더 효율적이 되자 세상은 더 많은 엔진을 만들었다. 더 많은 공장. 더 많은 기차. 더 많은 굴뚝. 하늘은 더 빨리 검어졌다.

민준은 자신의 회사 서버실을 떠올렸다.

더 적은 시간으로 더 많은 코드. 더 적은 개발자로 더 많은 기능. 더 적은 생각으로 더 많은 배포. 그리고 더 많은 알림. 더 많은 장애. 더 많은 책임.

인간의 하늘도 검어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켜졌다. 세영이었다.

오빠, 나 퇴사하려고.

민준은 한참 동안 답장을 쓰지 못했다.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근데 그냥 도망치는 느낌이라 좀 그렇다.

민준은 화면을 바라봤다.

도망.

그 단어가 이상하게 부러웠다. 도망칠 수 있다는 건 아직 몸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자기 발이 있다는 뜻이었다. 민준은 자신이 이미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연봉, 대출, 경력, 직함, 주식 보상, 책임감. 그럴듯한 단어들이 줄이 되어 그의 발목을 감고 있었다.

그는 답장을 썼다.

도망이 아니라 탈출일 수도 있어.

보내고 나서 민준은 오래 웃었다. 남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는 못 하면서.

* * *

6 월요일의 제안

월요일 아침, 민준은 CTO에게 불려 갔다.

회의실 이름은 Mercury였다. 회사는 회의실에 행성 이름을 붙였다. 우주는 넓고, 일정은 좁았다.

도윤은 노트북을 열어둔 채 말했다.

"지난주 장애 건은 잘 수습했어요. 고생했습니다."

민준은 고개만 끄덕였다. 칭찬은 늘 다음 요구사항의 포장지였다.

도윤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AI 기반 개발 프로세스를 더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민준님이 그 TF 리드를 맡아줬으면 해요."

"어떤 TF입니까?"

"개발 생산성 10배 프로젝트."

민준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10배.

사람들은 왜 그렇게 10배를 좋아할까. 2배도 미친 짓인데 10배라니. 인간의 몸을 모르니까 저런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심장은 10배로 못 뛴다. 뇌는 10배로 못 쉬고, 눈은 10배로 못 깜빡이며, 잠은 10배로 압축되지 않는다.

도윤은 신나 있었다.

"지금은 AI를 개인 단위로 쓰잖아요. 다음 단계는 워크플로우 전체 자동화입니다. 기획서 들어오면 AI가 요구사항 쪼개고, 티켓 만들고, 코드 초안 만들고, 테스트 만들고, 리뷰 코멘트까지 달고. 개발자는 승인과 예외 처리 중심으로 가는 거죠."

민준이 물었다.

"그러면 개발자는 뭘 합니까?"

도윤은 잠깐 멈췄다. 그 표정은 정말로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했다.

"더 중요한 일을 하죠."

"더 중요한 일이 뭡니까?"

"판단이요."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개발자가 하는 판단은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이 코드를 믿어도 되는가. 이 알림을 지금 봐야 하는가. 이 장애가 내 책임인가. 이 밤을 또 포기해야 하는가. 이 회사를 더 다녀도 되는가.

도윤이 말했다.

"민준님 같은 시니어가 꼭 필요합니다. AI가 속도를 만들면, 시니어는 방향을 잡아야죠."

민준은 회의실 유리벽 너머 사무실을 봤다. 개발자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헤드셋을 끼고, 모니터 두세 개를 켜고, 채팅창과 IDE와 이슈 보드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어딘가 비슷했다. 피곤한 사람은 직군과 나이에 상관없이 같은 표정을 갖는다.

그들은 석탄이었다. 회사라는 엔진은 더 효율적으로 그들을 태우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민준은 말했다.

"싫습니다."

도윤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그 TF 리드 안 합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민준은 잠깐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돌려 말했을 것이다. 커리어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든가, 현재 프로젝트 집중도가 필요하다든가, 리소스 재조정이 필요하다든가. 회사에서 배운 안전한 말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척하는 문장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효율을 만든 게 아닙니다. 소비량을 늘린 겁니다."

도윤은 말이 없었다.

민준은 계속했다.

"AI 덕분에 코드 작성 비용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기능 요구가 늘었고, 배포가 늘었고, 장애가 늘었고, 컨텍스트 전환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생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건 과도기적 문제 아닐까요?"

"아닙니다. 구조적 문제입니다."

민준은 자기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태우는 엔진을 만들면, 사람들은 석탄을 아끼지 않습니다. 엔진을 더 많이 만듭니다. 지금 우리는 개발자를 아끼는 도구를 만든 게 아니라, 개발자를 더 많이 태울 수 있는 보일러를 만든 겁니다."

도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비유가 좀 과하네요."

"현실은 더 과합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유리벽 밖으로 슬랙 알림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띵. 띵. 띵.

작은 종소리 같았다. 광산 입구에서 울리는 종.

* * *

7 풀 리퀘스트

그날 오후, 민준은 사내 위키에 문서 하나를 올렸다.

제목은 짧았다.

AI 도입 이후 개발 조직의 숨은 비용

문서는 길지 않았다. 그는 숫자를 넣었다. AI 도입 전후 티켓 생성량, PR 생성량, 리뷰 대기 시간, 장애 발생률, 야간 호출 횟수, 평균 슬랙 응답 시간, 개발자별 컨텍스트 전환 횟수.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AI가 개발자의 작업 단가를 낮추자, 조직은 작업 수요를 제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끝내는 조직이 아니라, 같은 사람을 더 자주 중단시키고 더 빨리 소모시키는 조직이 되었다. 효율 향상은 자동으로 여유를 만들지 않는다. 여유는 정책으로 보호해야 한다. 제안: 1. AI 도입으로 절감된 시간의 50%는 신규 티켓이 아니라 회복 시간과 기술부채 상환에 배정한다. 2. AI 생성 코드에는 별도 위험 등급을 부여하고, 핵심 결제·인증·권한 영역에서는 독립 리뷰를 의무화한다. 3. 개발자별 코드 생성량을 성과 지표로 쓰지 않는다. 4. 컨텍스트 전환 횟수를 줄이는 것을 생산성 목표에 포함한다. 5. 야간 장애 대응 이후 최소 반나절 회복 시간을 보장한다. 6. 'AI로 금방 되지 않나요?'라는 말은 추정이 아니라 검토 요청으로 간주한다.

문서를 올린 뒤 민준은 기다렸다. 처음 10분 동안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다음 이모지가 하나 붙었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뜻.

그다음 세영이 댓글을 달았다.

퇴사 전에 이거 보고 싶었음.

곧이어 백엔드 팀의 재호가 댓글을 달았다.

3번 진짜 중요합니다. 코드 라인 수 지표 때문에 다들 미쳐가고 있어요.

프론트엔드의 은채도 달았다.

AI가 만든 코드 리뷰하는 시간이 지표에 안 잡힙니다. 그래서 리뷰하는 사람이 손해 봅니다.

QA 팀의 현우가 썼다.

테스트 자동화율은 올랐는데, 이상하게 수동 확인은 더 늘었습니다. 자동화된 테스트가 많아질수록 그 테스트가 맞는지도 사람이 봐야 합니다.

댓글은 계속 늘었다.

띵. 띵. 띵.

알림음이 울렸다. 처음으로 그 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이번에는 광산의 종이 아니라, 땅속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아직 살아 있다고 알리는 소리.

* * *

8 인간을 아끼는 기술

다음 주, 회사는 소란스러웠다.

문서는 사내 전체로 퍼졌다. 누군가는 민준이 용감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정치질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했다. 누군가는 드디어 누가 말해줬다고 했다.

CTO는 민준을 다시 불렀다. 이번 회의실은 Saturn이었다. 토성. 고리가 있는 행성. 민준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리란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얼음과 먼지와 돌덩어리일 뿐이다. 회사의 비전도 그랬다.

도윤은 전보다 피곤해 보였다.

"문서 반응이 크네요."

"그렇더군요."

"대표님도 봤습니다."

"그렇습니까."

"불편해하십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합니다."

도윤은 한참 말이 없다가 물었다.

"민준님은 AI 도입을 반대하는 겁니까?"

"아니요."

"그럼 뭘 원하는 겁니까?"

민준은 이번에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AI가 사람을 아끼게 만들고 싶습니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민준은 이어 말했다.

"지금은 AI가 회사를 더 탐욕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 많이 만들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요구합니다. 더 빨리 답할 수 있으니까 더 빨리 부릅니다. 더 쉽게 코드를 만들 수 있으니까 더 쉽게 일을 벌입니다."

"시장 경쟁이 그렇습니다."

"그 말로는 아무것도 설명 못 합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시장 경쟁 때문에 사람을 태운다면, 적어도 우리가 뭘 태우고 있는지는 알아야죠."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유리창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한 사람은 지쳐 있었고, 다른 한 사람도 지쳐 있었다.

민준은 그때 처음 알았다. 도윤도 엔진이 아니었다. 그도 또 다른 보일러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대표, 투자자, 시장, 경쟁사, 기사, 주가, 채용 브랜딩. 그 역시 다른 이름의 알림들에 쫓기고 있었다.

다만 더 높은 층에서 타고 있을 뿐이었다.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TF 리드를 맡아주세요."

민준은 웃었다. "아까는 거절했습니다."

"이번엔 주제가 다릅니다."

도윤이 노트북을 돌려 보여줬다. 새 문서 제목이 있었다.

Human-Safe AI Development Process

민준은 화면을 바라봤다.

도윤이 말했다.

"생산성 10배 프로젝트는 보류하겠습니다. 대신 이걸 해봅시다. AI를 더 많이 쓰는 조직이 아니라, AI를 써도 사람이 망가지지 않는 조직."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믿을 수는 없었다. 회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엔진은 한 번 뜨거워지면 식는 데 오래 걸린다. 그리고 많은 경우, 식기 전에 더 많은 석탄을 요구한다.

하지만 균열은 생겼다. 작고 못생긴 균열. 그게 시작일 때도 있다.

민준은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첫 번째, 코드 생성량 지표 폐지."

도윤이 메모했다.

"두 번째, 회복 시간은 복지가 아니라 프로세스로 넣습니다."

"세 번째는요?"

민준은 유리벽 밖을 봤다. 개발자들이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사내 위키 문서를 열어두고 있었다. 댓글을 쓰고 있었다. 자기 경험을 숫자가 아니라 문장으로 남기고 있었다.

민준은 말했다.

"AI가 만든 모든 절약 시간을 회사가 전부 가져가면 안 됩니다. 절반은 인간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 * *

9 절반의 저항

그날 이후 회사가 완전히 좋아졌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런 일은 없다.

자본주의 회사는 어느 날 갑자기 수도원이 되지 않는다. 관리자는 숫자를 좋아하고, 투자자는 성장을 원하고, 고객은 더 빠른 기능을 요구한다. AI는 계속 코드를 만들고, 티켓은 여전히 새끼를 쳤다.

하지만 몇 가지가 바뀌었다.

코드 라인 수 대시보드가 사라졌다. 야간 장애 대응 다음 날 오전에는 회의가 잡히지 않았다. AI 생성 코드에는 위험 라벨이 붙었다.

"AI로 금방 되지 않나요?"라는 말이 나오면, 누군가 바로 물었다.

"금방 된다는 근거가 뭔데요?"

그 질문 하나가 작은 방파제가 됐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했다. 특히 기획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금방이라는 말은 편리한 폭력이었다. 그 폭력에 비용표를 붙이자 사람들은 조금 조심해졌다.

세영은 결국 퇴사했다.

마지막 날, 그녀는 민준에게 말했다.

"그래도 오빠 문서 덕분에 좀 덜 억울하게 나가."

"미안하다. 더 빨리 썼어야 했는데."

세영은 웃었다.

"개발자는 다 늦게 깨닫잖아. 장애 나고 나서야 로그 보니까."

그 말에 민준도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인간은 대체로 장애가 난 뒤에야 구조를 본다. 시스템이 멈춰야 설계를 의심한다. 몸이 망가져야 삶의 아키텍처를 본다.

세영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그녀가 남긴 댓글은 위키에 계속 남아 있었다.

효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효율을 통제해야 한다.

민준은 그 문장을 자주 읽었다. 좋은 코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경고였다.

* * *

10 엔진을 끄는 법

몇 달 뒤, 민준은 새로 입사한 주니어 개발자 온보딩을 맡았다.

신입의 이름은 지안이었다. 지안은 눈이 반짝였다. AI 도구를 능숙하게 썼고, 프롬프트도 잘 짰다. 민준은 그런 젊은 개발자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과 걱정이 섞인 감정.

지안이 물었다.

"선배, AI 쓰면 개발자가 더 편해질까요?"

민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사무실 유리창에 노을이 번졌다. 모니터들은 하나둘 어두워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간에도 다들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적어도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정시 퇴근을 지키려 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지키려 했다.

그게 중요했다.

민준은 말했다.

"그냥 쓰면 더 힘들어져."

지안이 눈을 크게 떴다. "왜요?"

"도구가 일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일을 싸게 만들어주거든. 일이 싸지면 사람들이 더 많이 시켜."

"그럼 안 쓰는 게 나아요?"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써야지. 좋은 도구야. 다만 도구가 만든 여유를 누가 가져가는지 봐야 해."

"누가 가져가는데요?"

민준은 웃었다.

"보통은 회사가 가져가려고 하지."

지안도 웃었다. 농담인 줄 안 모양이었다.

민준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때로는 진실도 농담처럼 들어가야 오래 남는다.

그는 지안의 노트북에 온보딩 문서를 띄워줬다.

AI와 함께 일하는 법 속도는 목적이 아니다. 사람을 태우는 효율은 실패한 효율이다.

지안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좀 무섭네요."

"무서워야 해."

민준은 말했다.

"무섭지 않은 기술은 대체로 누군가를 대신 무섭게 만들거든."

퇴근 시간이 됐다.

슬랙 상태가 하나둘 회색으로 바뀌었다.

민준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 소리가 좋았다.

딸깍.

작고 분명한 소리. 엔진을 끄는 소리.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민준은 건물 앞에 잠깐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도시는 여전히 밝았다. 너무 밝았다. 어딘가의 서버는 계속 돌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AI는 계속 코드를 만들고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새 티켓은 또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민준은 집에 갈 것이다. 밥을 먹을 것이다. 잠을 잘 것이다. 내일 다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도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알림이 세 개 와 있었다. 민준은 잠깐 보고, 화면을 껐다.

모든 불에 석탄을 넣을 필요는 없다.

때로는 타오르지 않는 것이 가장 강한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