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냄새 없는 방
새벽 세 시 십칠분.
클린룸은 하얀 짐승의 뱃속 같았다.
천장에서는 찬바람이 내려왔다. 바람에는 냄새가 없었다. 냄새가 없다는 게 오히려 목을 긁었다. 사람 냄새, 밥 냄새, 담배 냄새, 머리카락 타는 냄새, 젖은 양말 냄새, 그런 것들을 모조리 걸러낸 바람이었다. 바람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죽은 것 같았다.
서민재는 방진복 안에서 숨을 삼켰다.
마스크 안쪽에 김이 맺혔다.
금방 사라졌다.
또 맺혔다.
또 사라졌다.
그렇게 사람의 숨도 공정표처럼 반복됐다.
장비가 울었다.
삐익.
민재는 장갑 낀 손가락으로 패널을 눌렀다. 붉은 숫자가 파랗게 바뀌었다. 그 작은 색 하나를 바꾸려고 세 사람이 밤을 새웠고, 한 사람은 차 안에서 목이 꺾인 채 십칠분 잤고, 한 사람은 아이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아직 열어보지 못했다.
민재의 귀 안쪽에는 늘 알람 소리가 살았다.
집에 가서 샤워기를 틀어도 들렸다.
아이 앞머리를 말려줄 때도 들렸다.
아내가 식탁에 국그릇을 내려놓을 때도 들렸다.
삐익.
그 소리는 귀가 아니라 뼛속에 박혔다.
옆 라인에서 최강호가 걸어왔다. 방진복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눈만 보였다. 눈 밑이 푹 꺼져 있었다. 오른쪽 귀가 먹먹한 사람답게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강호가 말했다.
"점심 때 내려와라."
민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또 모여요?"
"이번엔 그냥 모이는 거 아니야."
"라인은요?"
강호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코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였다.
"라인은 평생 안 죽어. 사람만 죽지."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방진복 안으로 들어와 가슴팍에 붙었다.
사람만 죽지.
민재의 아버지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다. 서류에는 죽었다고 쓰이지 않았다. 오른쪽 팔을 잃었고, 왼쪽 다리 신경이 망가졌고, 폐에 먼지가 박혔고, 밤마다 식은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삼성전자 담장 안 사람이 아니었다.
담장 밖 하청업체 사람이었다.
담장 안 장비를 고치러 들어갔다가, 담장 밖 병원으로 실려 나왔다.
회사 이름은 작았다.
책임자 이름은 더 작았다.
합의서 글자는 아주 작았다.
아버지는 손도장을 찍고 돌아온 날, 부엌 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소주 냄새가 싱크대 배수구 냄새와 섞였다.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다가 떨어뜨렸다. 손가락 두 개가 말을 안 들었다.
그때 민재는 열일곱이었다.
깨진 잔 조각을 주우려다 손끝을 베었다.
피가 났다.
혀로 핥았다.
쇠맛이 났다.
그 뒤로 민재는 숫자에서 쇠맛을 맡았다.
그리고 요 며칠, 사람들 입 안에서 자꾸 굴러다니는 숫자가 있었다.
15퍼센트.
그 숫자는 피 냄새가 났다.
二 밥알과 구호
점심 식당은 뜨거운 국물과 젖은 말들로 가득했다.
쇠쟁반이 부딪혔다.
국통 뚜껑이 덜컹거렸다.
생선튀김 껍질이 이빨 사이에서 바삭 부서졌다.
김치 국물이 식판 모서리로 흘러 밥알 몇 개를 붉게 적셨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봤다.
삼성전자 노조.
영업이익 15%.
성과급.
파업.
필수 인력.
자막은 짧았다.
사람 몸은 길었다.
태준이 숟가락으로 밥을 꾹꾹 눌렀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놈이었다. 눈 밑에 푸른 그늘이 있었고, 손목에는 파스 냄새가 났다.
"형,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민재가 물었다.
"뭐를."
"그 돈이요."
태준은 입가에 고춧가루를 묻히고 말했다.
"밤샌 거 우리고, 불량 터지면 깨지는 것도 우리고, 명절에 불려오는 것도 우리잖아요. 위에서는 맨날 가족이라면서요. 가족이면 밥상에 고기 올라왔을 때 같이 먹어야죠."
강호가 식판을 들고 와 앉았다.
탕.
식판이 울렸다.
"가족은 제사상 차릴 때 필요한 말이야. 유산 나눌 때는 남이지."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웃음이 짧게 튀었다가 식판 밑으로 숨어버렸다.
강호는 국물을 마셨다. 뜨거운지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회사가 어려울 땐 허리띠 졸라매라. 회사가 잘되면 미래를 봐라. 그 미래라는 놈은 왜 매번 우리 월급봉투 앞에서만 나타나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멸치볶음 하나를 씹었다. 딱딱한 멸치 대가리가 잇몸을 찔렀다. 피맛이 올라왔다.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 맛을 그냥 뒀다.
강호가 민재를 봤다.
"넌 왜 입 다물고 있냐."
"입 열면 말이 꼬일 것 같아서요."
"꼬여도 뱉어."
민재는 식판 위 김치 국물을 봤다. 붉은 기름이 동그랗게 떠 있었다.
"우리 몫이 있는 건 알아요."
"그럼 됐네."
"근데 담장 밖에도 사람이 있어요."
강호의 숟가락이 멈췄다.
"그 말, 저 위에서 좋아하겠다."
"나도 알아요."
"그럼 하지 마."
민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리 아버지가 담장 밖 사람이었어요."
식탁 위가 조용해졌다.
국통 쪽에서 뚜껑 닫히는 소리만 났다.
민재가 말했다.
"장비 고치러 들어갔다가 팔 하나 두고 나왔어요. 서류에는 부주의라고 적혔어요. 회사 사람은 와서 말했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 그때도 다들 선을 말했어요. 계약서 선. 책임 선. 원청과 하청 선. 산재와 개인 부주의 선."
강호의 눈이 작아졌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선이라는 말만 들으면 손가락이 저려요."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민재는 말을 멈췄다. 더 말하면 아버지의 잘린 소매 냄새가 식당까지 올 것 같았다. 기름때, 병원 소독약, 오래된 소주, 말라붙은 침 냄새.
강호가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러면 더 싸워야지."
민재가 강호를 봤다.
강호의 눈은 칼날처럼 얇았다.
"네 아버지 같은 사람 안 만들려면 더 세게 잡아야지. 회사가 먼저 사람을 숫자로 만들었어. 이제 숫자로 돌려받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
그 말은 맞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민재는 더 오래 씹었다.
밥알이 입 안에서 풀처럼 으깨졌다.
三 박노식의 손톱
정문 밖에는 박노식의 트럭이 서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은 아스팔트 위에서 튀어 올랐다. 노조 깃발은 물을 먹고 축 처졌다. 스피커에서는 목이 쉰 남자의 구호가 나왔다. 소리는 비닐 천막을 때리고, 경비실 유리창을 때리고, 노식의 트럭 앞유리를 때렸다.
성과의 몫을 보장하라.
영업이익 15퍼센트.
노식은 운전석에서 손톱을 봤다.
손톱 밑에 검은 기름때가 껴 있었다. 씻어도 빠지지 않았다. 비누로 문지르면 손등 피부만 갈라졌다. 겨울에는 갈라진 틈마다 피가 말라붙었다. 여름에는 그 틈으로 절삭유 냄새가 스며들었다.
조수석에는 은행 봉투가 있었다.
대출 만기.
급여일.
납품 지연 시 패널티.
글자들이 봉투 안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노식의 회사는 스물일곱 명짜리였다. 회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천장 낮은 공장, 녹슨 선풍기 세 대, 프레스 두 대, 손가락 하나 없는 반장, 허리가 굽은 경리, 점심마다 김치통을 가져오는 베트남 청년 둘.
삼성 라인이 돌면 그들도 돌았다.
삼성 라인이 멈추면 그들의 손도 멈췄다.
노식은 노조를 욕하지 않았다.
그도 월급봉투 얇은 밤을 안다. 아이 운동화 밑창이 벌어졌는데 월요일까지 돈이 안 들어오는 밤을 안다. 공장 임대료 문자가 휴대폰 위에 뜨면 침이 마르는 것도 안다. 사람은 돈 앞에서 턱부터 굳는다.
그래도 저 구호가 정문을 막을 때, 노식의 목도 같이 막혔다.
그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비 냄새, 젖은 깃발 냄새, 담배 냄새, 경유 냄새가 들어왔다. 멀리서 누가 컵라면을 먹는지 뜨거운 스프 냄새도 났다.
그때 깃대 하나가 바람에 밀려 트럭 앞유리를 쳤다.
툭.
노식은 눈을 깜빡였다.
또 쳤다.
툭.
그는 와이퍼를 켰다. 와이퍼가 유리 위를 긁었다. 물방울이 양쪽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모였다. 마치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 같았다.
노식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장 반장이었다.
"사장님, 오늘 들어가요?"
노식은 정문을 봤다. 경비원은 난처한 얼굴로 무전기를 잡고 있었다. 노조원들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한 공장 건물이 침묵하고 있었다.
"기다려."
"직원들 뭐라고 해요?"
노식은 입술을 핥았다. 캔커피 쇠맛이 아직 혀에 남아 있었다.
"기계 닦고 있으라 해."
"월급은요?"
노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문 쪽에서 구호가 다시 올라왔다.
15퍼센트.
15퍼센트.
15퍼센트.
노식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손톱 밑 검은 때가 화면에 묻었다.
四 위장약
이정원은 회의실에서 위장약을 씹었다.
하얀 알약이 어금니 사이에서 부서졌다. 쓴 가루가 혀 위에 퍼졌다.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쓴맛이 목구멍에 붙어 있으면 잠이 덜 왔다.
그는 삼성전자 인사팀 임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틀리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그의 목소리는 늘 일정했다. 숫자를 말할 때도, 해고를 말할 때도, 성과급을 말할 때도, 고객사 이탈을 말할 때도, 목소리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톱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손끝 살이 붉었다. 그는 전화가 길어질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해외 고객사와 통화할 때, 투자 계획표를 볼 때, 노조 요구안을 볼 때, 어린 딸이 보낸 사진을 읽지 못하고 넘길 때.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공장 굴뚝이 보였다.
그는 자료를 넘겼다.
영업이익.
순이익.
투자금.
R&D.
협력업체 대금.
배당.
세금.
인건비.
성과급.
숫자들은 가지런했다. 숫자들은 예의가 있었다. 줄을 맞춰 서 있었고, 소리 지르지 않았고, 비를 맞지도 않았다. 숫자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숫자를 한 칸 옮기면 어딘가에서 사람이 다쳤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이정원도 처음부터 유리방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젊을 때 그는 라인 옆 사무동에서 일했다. 밤마다 알람을 들었고, 새벽 네 시 컵라면 냄새를 맡았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코피를 씻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위장약을 씹으며 말했다.
"영업이익은 월급봉투가 아닙니다."
회의실 안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정원이 다시 말했다.
"그 돈에는 아직 빠져나갈 것들이 많습니다. 세금, 투자, 장비, 연구, 협력업체, 주주, 다음 공장. 지금 다 나눠 먹으면, 다음 파도 올 때 배에 구멍 납니다."
누군가 말했다.
"현장 반발이 큽니다."
"압니다."
"파업이 길어지면 라인 리스크가 커집니다."
"압니다."
"노조는 고정 비율을 안 물러설 겁니다."
이정원은 물잔을 잡았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기가 손끝에 묻었다.
그는 잠깐 민재 같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방진복 안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 자기 딸 생일 케이크 사진을 휴게실에서 보는 사람들. 욕하면서도 장비 알람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는 사람들.
그리고 박노식 같은 사람들도 떠올렸다. 계약서 맨 아래 작은 글씨에 목줄이 걸린 사람들.
그는 손끝의 물기를 바지에 닦았다.
"고정 비율은 안 됩니다."
말은 차갑게 나갔다.
위장약 쓴맛이 혀 밑에서 다시 올라왔다.
五 아버지의 소매
민재는 퇴근하지 않고 병원에 들렀다.
아버지는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문 쪽 벽지는 누렇게 떠 있었다. 복도에서는 소독약 냄새, 죽 냄새, 오래 누운 사람의 이불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텔레비전에서는 낮은 볼륨으로 트로트가 흘렀다.
아버지의 오른쪽 소매는 늘 납작했다.
팔이 없는 쪽 소매는 바람 빠진 장갑처럼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민재는 그 소매를 볼 때마다 혀끝에 쇠맛이 돌았다.
아버지는 눈을 떴다.
"왔냐."
"응."
"회사 안 가고?"
"갔다 왔어."
"또 밤샜냐."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술 껍질이 갈라져 있었다.
"뉴스 나오더라."
민재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 회사 시끄럽더라."
"응."
"너는?"
"나도 시끄러워."
아버지는 웃으려다 기침했다. 가슴 안에서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민재는 컵에 물을 따라 빨대를 꽂았다. 아버지가 빨대를 문 입술은 오래된 고무처럼 보였다.
"싸워라."
아버지가 말했다.
민재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가 그런 말 할 줄 몰랐네."
"나 같은 놈 안 되려면 싸워야지."
민재는 무릎 위 손을 내려다봤다. 손톱 옆 살이 일어나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근데."
병실 밖에서 카트 바퀴가 굴러갔다. 덜컹. 덜컹. 덜컹.
"네가 밟고 선 놈이 누군지는 보고 싸워라."
민재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창문 쪽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병원 주차장과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얼룩말 가죽 같았다.
"나는 원청 놈들한테 밟힌 줄만 알았다. 맞다. 밟혔다. 근데 나중에 보니까 내 밑에도 누가 있더라. 일용직. 외국 애들. 청소하는 아줌마. 식당에서 국 푸는 아줌마. 내가 욕하면서 지나간 놈들. 그놈들 얼굴은 기억도 안 나."
아버지는 마른 손으로 납작한 소매를 만졌다.
"사람은 위만 쳐다보면 발밑을 못 봐."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등에 주삿바늘 자국이 많았다.
푸른 멍이 꽃처럼 번져 있었다.
꽃이라 부르기에는 색이 너무 탁했다.
민재는 병실을 나오며 손을 씻었다.
비누 냄새가 독했다.
손을 오래 문질렀다.
그래도 방진복 고무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六 깃발 밑
파업 첫날, 공장 정문 앞은 젖은 북처럼 울렸다.
사람들이 모였다.
비옷이 서로 스쳤다.
마이크가 쇳소리를 냈다.
스피커가 목을 찢었다.
구호가 담장을 때렸다가 돌아왔다.
강호가 단상 위에 섰다.
그는 마이크를 잡기 전에 오른쪽 귀를 한 번 눌렀다. 그 귀는 오래전부터 반쯤 닫혀 있었다. 젊은 날 라인에서 알람 소리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다. 산재 신청은 흐지부지됐다. 검사표에는 기준치 미만이라고 찍혔다. 강호는 그 종이를 아직 갖고 있었다. 집 서랍 맨 아래, 아이 돌사진 밑에.
강호가 외쳤다.
"우리가 밤을 넣었다!"
사람들이 외쳤다.
"그렇다!"
"우리가 몸을 넣었다!"
"그렇다!"
"우리가 이익을 만들었다!"
"그렇다!"
민재도 그 안에 서 있었다.
그는 주먹을 들었다.
손바닥 안에 땀이 찼다.
비와 땀이 섞여 손목으로 흘렀다.
강호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저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다리라고. 미래를 보라고. 회사 전체를 보라고. 나라를 보라고. 그런데 우리의 밤은 누가 봤나. 우리의 귀는 누가 봤나. 우리의 허리는 누가 봤나. 우리의 아이가 식탁에 앉아 빈 의자를 보는 걸 누가 봤나."
민재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그 말은 너무 가까웠다.
어젯밤 아이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그는 아직 듣지 못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축축했다. 방수팩 안에서 화면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 정문 옆에서 소리가 났다.
툭.
깃대 하나가 박노식의 트럭 앞유리를 쳤다.
툭.
다시 쳤다.
노식은 운전석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와이퍼만 움직였다. 좌우로, 좌우로. 유리 위의 물을 밀어냈다. 그러나 깃대 자국은 소리로 남았다.
민재는 그 소리를 들었다.
스피커보다 작았다.
구호보다 작았다.
빗소리보다 작았다.
그런데 귀 안쪽에서 더 크게 울렸다.
툭.
七 B-7
밤 아홉 시 사십이분.
탈의실 바닥에는 젖은 발자국들이 겹쳐 있었다. 방진복을 벗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눌렸고, 얼굴에는 마스크 자국이 남았다. 누군가는 컵라면을 먹었다. 김이 올라왔다. 스프 냄새가 젖은 양말 냄새와 섞였다.
민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오늘 와?"
민재는 천장을 봤다. 형광등 안에 죽은 벌레 하나가 붙어 있었다.
"늦어."
전화기 너머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그림 봤어?"
민재는 눈을 감았다.
"아직."
"내가 보냈잖아."
"이따 볼게."
"맨날 이따래."
그 말 뒤로 숨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숨. 이불 속에서 나는 숨. 민재는 휴대폰을 더 세게 쥐었다.
"미안."
전화가 끊겼다.
바로 그때 방송이 울렸다.
"B-7 라인 이상 알람. 대응 인력 즉시 이동 바랍니다."
탈의실의 컵라면 젓가락이 멈췄다.
스피커에서 잡음이 났다.
치직. 치직.
다시 방송.
"B-7 라인 이상 알람."
태준이 민재를 봤다.
"형."
민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B-7은 어젯밤부터 수치가 흔들렸다. 억지로 눌러놓은 장비였다. 사람 몸으로 치면 열이 오르는데 해열제만 먹인 꼴이었다.
강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지 마."
민재는 방진복을 봤다. 벗어놓은 방진복은 바닥에 늘어진 허물 같았다.
강호가 다가왔다.
"지금 들어가면 내일 저쪽은 우리를 더 우습게 봐."
민재는 손을 씻으러 갔다.
강호가 뒤에서 말했다.
"민재야."
물소리가 세면대에 부딪혔다.
"너 지금 누구 편이냐."
민재는 비누를 짰다. 손바닥에서 거품이 일었다. 거품은 금방 회색으로 변했다. 손톱 밑 먼지와 방진복 안쪽 땀이 섞였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나도 몰라요."
강호의 얼굴이 굳었다.
민재가 말했다.
"아는 놈들이 제일 먼저 짐승 되더라고요."
태준은 숨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민재는 방진복을 다시 입었다. 팔을 넣고, 지퍼를 올리고, 후드를 쓰고, 장갑을 꼈다. 자기 얼굴이 거울에서 사라졌다. 눈만 남았다.
강호가 낮게 말했다.
"배신자 소리 들을 거다."
민재는 문을 열었다.
"그 소리도 사람이 해야 들려요."
복도에서 찬바람이 밀려왔다.
민재는 뛰었다.
八 불량의 냄새
B-7 라인은 낮게 떨고 있었다.
장비 앞에 서자 민재는 냄새를 맡았다. 클린룸에는 냄새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타는 냄새가 났다. 플라스틱이 뜨거운 금속에 닿았을 때 나는 냄새. 누구도 맡지 못할 만큼 옅은 냄새. 그러나 민재는 맡았다.
"태준아, 로그."
"압력 튑니다."
"밸브."
"반응 늦습니다."
"수동 전환."
"형, 이거 잘못 잡으면 더 튑니다."
"잡아."
태준의 손이 떨렸다. 장갑 끝이 패널 모서리에 닿았다. 삑. 삑. 삑.
알람은 더 빨라졌다.
붉은 숫자가 눈에 박혔다.
노란 경고창이 떠올랐다.
장비 내부에서 낮은 마찰음이 났다.
민재는 숨을 멈췄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얼굴이 지나갔다.
아버지의 납작한 소매.
강호의 먹먹한 오른쪽 귀.
박노식의 손톱 밑 기름때.
이정원의 물어뜯긴 손끝.
아내가 식탁에 놓았을 식은 국.
아이가 보낸 그림 파일.
삐익.
민재는 손가락을 뻗었다.
숫자가 흔들렸다.
붉은색이 길게 번졌다.
마치 상처에서 피가 퍼지는 것 같았다.
태준이 말했다.
"안 잡힙니다."
"다시."
"형."
"다시."
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마스크 안에서 턱 근육이 움직였다.
몇 초가 지나갔다.
장비음이 낮아졌다.
우우웅.
붉은 숫자가 노랗게 바뀌었다.
노란 숫자가 파랗게 바뀌었다.
알람이 끊겼다.
클린룸 안에 공조기 소리만 남았다.
민재는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 금속이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장갑을 뚫고 들어왔다.
태준은 바닥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버텼다.
"살았네요."
민재는 장비 유리창을 봤다.
유리창에는 자기 눈이 비쳤다.
눈 안쪽에 흰빛이 흔들렸다.
그때 바닥에 작은 발자국 하나가 보였다.
방진화 밑창에서 묻은 희미한 자국. 청소 장비가 지나가면 사라질 자국. 누구 이름도 달리지 않을 자국.
민재는 그 자국을 한참 봤다.
이 공장은 지워지는 발자국 위에 서 있었다.
九 사라진 얼굴
새벽 다섯 시.
정문 밖 공기는 젖은 쇠처럼 차가웠다. 파업 천막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은 전등 아래로 날벌레 몇 마리가 돌았다. 커피 종이컵들이 쓰레기봉투 안에서 젖어 있었다.
강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민재가 다가가자 강호는 고개만 돌렸다.
"살렸냐."
"네."
강호는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가 비 젖은 공기 속에서 낮게 퍼졌다.
"잘했다는 말은 안 한다."
"알아요."
"욕도 안 한다."
민재는 강호 옆에 섰다.
둘은 정문을 봤다.
박노식의 트럭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노식이 서류를 내밀었다. 경비원이 도장을 찍었다. 종이에 빨간 인주가 번졌다.
강호가 말했다.
"나는 아직도 15퍼센트가 틀렸다고 생각 안 한다."
민재는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맞는지 모르겠어요."
강호는 민재를 봤다.
그의 오른쪽 귀는 여전히 반쯤 닫혀 있었다. 빗물이 턱 끝에서 떨어졌다.
"모르면 됐다."
강호가 담배를 바닥에 눌러 껐다.
"아는 척하는 놈들부터 사람을 숫자로 세더라."
그는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민재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이가 보낸 그림 파일을 열었다.
화면이 작았다.
그림에는 엄마가 있었다. 아이가 있었다. 식탁이 있었다. 국그릇 두 개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자석이 붙어 있었다. 창밖에는 노란 해가 있었다.
아빠도 있었다.
그런데 아빠 얼굴은 없었다.
흰 방진복을 입은 몸만 서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아이는 아빠를 사람처럼 그리지 않았다. 공장 안에서 본 적도 없는 방진복을 그렸다. 민재가 집에 와도 고무 냄새를 데리고 오니까, 아이 손은 그 냄새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민재는 화면을 확대했다.
방진복 가슴팍에 아이가 삐뚤게 글자를 적어 놓았다.
아빠.
그 두 글자가 너무 컸다.
민재는 휴대폰을 끄지 못했다.
정문 안으로 통근버스들이 들어갔다. 버스 안 사람들은 잠에 덜 깬 얼굴로 창밖을 봤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노조 공지를 읽었고, 누군가는 주가창을 봤고, 누군가는 목베개를 만지작거렸다.
공장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다시 들어갔다.
흰옷을 입은 얼굴 없는 사람들이.
十 15퍼센트
협상은 며칠 더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서 숫자들이 밀리고 당겨졌다. 고정 비율은 깎였고, 산식은 바뀌었고, 자료 공개 항목이 늘었다. 회사는 버티다 종이 몇 장을 더 내놨고, 노조는 목이 쉰 채 일부 문장을 지웠다.
뉴스는 타결이라는 말을 썼다.
사람들은 댓글창에서 서로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민재는 그날도 클린룸에 있었다.
장비가 울었다.
삐익.
그는 패널을 눌렀다.
붉은 숫자가 파랗게 바뀌었다.
바깥에서는 노식이 직원들에게 월급을 보냈다. 한 명분은 하루 늦었다. 그는 송금 버튼을 누른 뒤 한참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화면에 묻은 손톱 밑 기름때를 소매로 문질렀다.
강호는 천막을 걷었다. 젖은 깃발을 접다가 오른쪽 귀를 눌렀다. 손바닥에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묻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이정원은 회의실에서 다시 위장약을 씹었다. 이번에는 물과 함께 삼켰다. 그래도 쓴맛은 남았다. 그는 딸이 보낸 사진을 열었다가 닫았다. 사진 속 딸은 케이크 앞에서 초를 불고 있었다. 그는 초 개수를 세다가 손톱을 입에 넣었다.
민재는 퇴근해 집에 갔다.
현관문을 열자 된장국 냄새가 났다. 오래 켜둔 전기장판 냄새도 났다. 신발장 위에는 아이 운동화가 한 짝 돌아누워 있었다. 작은 양말 하나가 거실까지 굴러와 있었다.
아내는 식탁을 닦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아이 그림이 붙어 있었다.
엄마.
아이.
식탁.
국그릇.
노란 해.
그리고 얼굴 없는 아빠.
민재는 세면대로 갔다.
비누를 묻혀 손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 손톱 밑, 손목까지 오래 문질렀다. 물이 하수구로 빠졌다. 거품이 빙빙 돌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고무 냄새가 남았다.
그는 다시 씻었다.
그래도 남았다.
거울 속에 민재 얼굴이 있었다. 눈이 충혈돼 있었다. 수염이 까칠하게 올라와 있었다. 입술 안쪽에는 깨문 자국이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다가 자기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방진복은 벗고 왔는데, 몸은 아직 흰옷을 입고 있었다.
거실에서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이불이 사각거렸다. 작은 발이 방바닥을 한 번 찼다. 민재는 물을 끄고 손을 털었다. 손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툭.
세면대에 떨어졌다.
툭.
또 떨어졌다.
정문 앞에서 깃대가 트럭 유리를 치던 소리와 같았다.
민재는 손을 수건에 닦지 않았다. 젖은 손으로 냉장고 앞에 섰다. 아이 그림 속 얼굴 없는 아빠를 오래 봤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그 얼굴 자리를 만졌다.
종이가 젖었다.
잉크가 아주 조금 번졌다.
아빠라는 두 글자 아래로, 검은 물이 실핏줄처럼 내려왔다.
민재는 손을 뗐다.
밖에서는 새벽 첫 트럭이 지나갔다. 경유 냄새가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멀리 공장 쪽 하늘이 희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 흰빛은 깨끗하지 않았다. 밤새 누군가의 폐와 손톱과 귓속을 지나온 색이었다.
15퍼센트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건 젖은 깃대 끝이었다.
트럭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납작한 소매였다.
강호의 닫힌 귀였다.
노식의 손톱 밑 검은 때였다.
이정원의 씹다 만 손톱이었다.
아이 그림 속 지워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민재의 손끝에서 아직 빠지지 않는 고무 냄새였다.
그 냄새는 오래 갔다.
아침이 와도 빠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