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삶을 만든다 — 문명은 왜 취약함 위에 세워졌는가 | 일벌


프롤로그

어느 저녁 식탁에서 시작된 질문


추석이었다. 외갓집 거실에 열두 명이 모였다. 갈비찜 냄비가 식탁 중앙에 놓였고, 아이들은 방에서 뛰어다녔다.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리모컨 볼륨을 올렸다.

재벌 총수의 보복 폭행 사건이 다시 화제였다. 명절마다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텔레비전이 불을 지피고, 식탁이 전장이 된다.

큰외삼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 자식이 맞았으면 나도 그랬을 거야."

작은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가만있겠어? 당연한 거지."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명절 식탁에서 논쟁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달,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계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계엄이 맞지. 나라가 이 꼴인데."

"군인들이 국회를 지키는 게 뭐가 문제야."

나는 메시지를 읽었다.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다시 지웠다. 결국 단톡방을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같은 언어로 말하고, 같은 명절에 같은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정의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군화를 질서라고 불렀다.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왜 같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그 문명의 원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법이 있으니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왜 법 대신 주먹을 택하는가. 경찰이 있으니까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왜 군인의 총구를 환영하는가.

단톡방을 나온 날 밤, 나는 오래 생각했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인가. 성격의 문제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그 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이 다치고, 죽고,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문명의 출발점인가. 그리고 이 자각을 잃어버린 사회는 어디로 향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청계산 폭행 사건의 기록을 읽었다. 천만 관객이 열광한 영화를 다시 보았다. 홉스와 롤스의 책을 펼쳤다. 밀그램의 실험 보고서를 뒤졌다. 그리고 내가 물속에서 배운 것들을 떠올렸다.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나는 하나의 규칙을 몸으로 배웠다. 물속에서 의식을 잃을 수 있다. 누구나. 언제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규칙이 생긴다. 규칙을 지키는 순간, 신뢰가 생긴다. 신뢰가 쌓이는 순간, 함께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문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네 개의 질문을 따라간다. 힘의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취약함은 어떻게 문명을 만들었는가. 문명은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가. 그리고 누가 문명을 지키는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식탁에서 시작된 질문이고, 식탁으로 돌아가는 답이다.


1부 — 힘의 세계: 야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1장. 쇠파이프와 전기충격기

한화 김승연 보복폭행 사건


2007년 3월, 서울 청담동. 금요일 밤이었다.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둘째 아들이 유흥업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시비가 붙었는지 정확한 경위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한다. 결과만 분명하다. 아들은 인근 클럽 종업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얼굴이 부었고, 피가 났다.

아버지에게 연락이 갔다.

김승연 회장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보디가드를 불렀다.

경호원들이 움직였다. 클럽 종업원들을 노래방을 통해 불러냈다. 다섯 명이 왔다. 노래방 종업원 세 명도 함께 끌려갔다. 총 여덟 명. 그들은 차에 태워져 청계산으로 갔다.

산속에서 일이 벌어졌다. 쇠파이프가 있었다. 전기충격기가 있었다. 여덟 명의 사람이 맞았다. 재벌 총수의 보디가드들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새벽 산속에서, 도망칠 곳 없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했다. 당연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조직폭력배처럼 사람을 끌고 가서 때렸다. 법이 있는 나라에서, 사적 보복이 벌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아들이 맞았는데 아버지가 가만있어?"

"그 위치에 있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솔직히 시원하지 않아?"

나는 이 반응들에 주목한다. 분노가 아니라 동조. 비판이 아니라 이해. 때로는 부러움.


사건의 결과를 보자.

김승연 회장은 감금, 폭행, 협박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이 열렸고, 판결이 내려졌다. 집행유예.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후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았다. 회장직에 복귀했다. 한화그룹은 여전히 대한민국 10대 재벌이다. 이글스는 여전히 야구를 한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다.

여덟 명의 피해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폭행 자체가 아니다. 폭행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첫째, 처벌이 솜방망이였다. 쇠파이프로 사람을 때린 사건에 집행유예가 나왔다. 법은 작동했지만, 정의롭게 작동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둘째, 사회적 기억이 짧았다. 사건은 뉴스가 되었고, 분노가 들끓었고, 그리고 잊혔다. 다른 뉴스가 덮었다. 다른 분노가 대체했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승연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해가 아니라 동조였다. 동조가 아니라 선망이었다.

"나도 그 힘이 있다면."

이 문장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오래되었다.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더 세게 때린다. 누군가 내 가족을 건드리면, 그 사람의 가족까지 건드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보다 더.

이 방식에는 분명한 매력이 있다. 빠르다. 명쾌하다.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다. 법원에 가서 몇 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변호사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힘이 곧 정의이고, 결과가 곧 판결이다.

문제는 하나다. 이 방식은 내가 강한 쪽일 때만 작동한다.

내가 약한 쪽이면? 내가 청계산에 끌려가는 쪽이면? 내가 쇠파이프 앞에 서는 쪽이면?

김승연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김승연의 위치에 있다고 상상했다. 아무도 자기가 청계산에 끌려가는 종업원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힘의 논리의 본질이다. 강자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본다. 그 시선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리적이다. 나는 강하다. 고로 나는 옳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왜 그런지, 다음 장에서 영화 한 편을 통해 살펴보자.


2장. 스크린 속 정의, 스크린 밖의 현실

영화 베테랑이 건드린 것


2015년 여름, 한국 영화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340만 명이 같은 영화를 보았다.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숫자다. 영화 제목은 《베테랑》. 감독은 류승완.

줄거리는 단순하다. 재벌 3세 조태오가 사람을 때리고, 돈으로 무마하고, 법 위에 군림한다. 형사 서도철이 쫓는다. 권력과 돈의 벽에 부딪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주먹이 날아간다.

관객들은 환호했다. 서도철의 주먹이 조태오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극장 안에서 박수가 터졌다.


류승완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캐릭터들은 실제 알고 지내던 형사들, 배우들의 성격, 그리고 실제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개별 사건보다, 이런 사건이 계속 반복되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에 주목했다."

조태오는 한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이다. 아들이 사고를 치면 아버지가 돈으로 덮는다. 변호사가 법을 비튼다. 언론이 침묵한다. 피해자가 합의금을 받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사건이 터진다.

《베테랑》이 건드린 것은 개인의 비리가 아니었다. 구조였다. 한국 사회의 핵심 제도, 특히 법 집행 시스템과 거대 재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1,340만 명이 이 영화를 보고 울고, 웃고, 분노했다. 그 안에서 모든 관객은 서도철이었다. 아무도 조태오가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서면 달라진다.

현실에서 재벌 총수가 사람을 때린 사건이 뉴스에 나오면, "그 위치에서는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속 조태오에게 분노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 간극이 이 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크린 앞에서는 약자의 편에 선다. 현실에서는 강자의 논리를 이해한다. 왜 그런가.


영화에는 규칙이 있다. 2시간 안에 선과 악이 구분된다. 악당은 벌을 받는다. 정의가 승리한다. 관객은 안전한 좌석에 앉아서 이 과정을 지켜본다. 비용이 없다. 위험이 없다. 서도철이 대신 싸워주니까.

현실에는 그런 규칙이 없다.

현실에서 재벌에게 맞선 형사는 징계를 받을 수 있다. 내부 고발자는 해고될 수 있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면 2차 가해를 당할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계산이 달라진다. 스크린 앞에서는 "옳은 것"을 선택했던 사람이, 현실에서는 "안전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합리화한다.

"세상이 원래 그래."

"바꿔봐야 바뀌는 게 없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베테랑》이 천만 관객을 모은 이유는 재미있어서만이 아니다. 이 영화가 관객들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벌의 뺨을 때려주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판타지였다. 달콤한 판타지.

그리고 판타지에는 한계가 있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이 돌아온다. 조태오는 감옥에 갔지만, 김승연은 사면을 받았다. 서도철은 이겼지만, 현실의 형사들은 여전히 벽 앞에 서 있다.

1,340만 명의 환호가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직장으로, 학교로, 가족 식탁으로.

그리고 같은 질문이 남는다. 왜 우리는 스크린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면서, 현실에서는 힘의 논리에 끌리는가.

다음 장에서 이 질문의 뿌리를 파본다.


3장. "내가 강한 쪽이면 괜찮다"

힘의 논리가 매력적인 이유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자.

운동장에서 가장 힘센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옆에 서면 안전했다. 그 아이 반대편에 서면 위험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배웠다. 강한 쪽에 서라. 그것이 생존이다.

이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도, 교육을 받아도, 문명 사회에 살아도. 형태만 바뀐다.


왜 그런가. 세 가지가 작동한다.

첫째, 안전 욕구. 강한 사람 옆에 서면 안전하다. 운동장에서도, 직장에서도, 정치에서도.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힘은 매력적이다. 누가 나를 지켜줄 것인가. 가장 강한 사람이다.

둘째, 대리 만족. 김승연의 보복을 "시원하다"고 말한 사람들은 대부분 보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는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 대신 해준다. 그 감각이 쾌감이 된다. 영화관에서 서도철의 주먹에 환호하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다.

셋째, 이기는 편에 서고 싶은 본능. 월드컵에서 이기는 팀의 유니폼이 팔린다. 선거에서 이길 것 같은 후보에게 표가 몰린다. 지는 쪽에 서는 것은 불쾌하다. 이기는 쪽에 서는 것은 기분 좋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스탠퍼드에서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에게 임시로 권력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들은 변했다. 타인의 말을 덜 들었다. 규칙을 더 자주 무시했다. 자기 목표에만 집중했다.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

흥미로운 것은 관찰자도 변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강자의 행동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한다. 강자가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당하는 일에는 약자에게도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믿고 싶은 욕구가 있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긴다고. 이 믿음은 편리하다. 내가 잘 살고 있으면 내가 잘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으면 그 사람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사적 폭력에 대한 은밀한 동조는 여기서 나온다.

법적 절차는 느리다. 복잡하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때로는 불공정하다. 재벌이 집행유예를 받는 것을 수십 년간 지켜본 사람들에게, 법은 신뢰할 만한 도구가 아니다.

반면 힘에 의한 해결은 빠르다. 명쾌하다. 결과가 즉시 보인다. 쇠파이프가 정의를 대신한다. 물론 그것은 정의가 아니지만, 정의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것이다. 힘에 의한 해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힘을 가진 쪽이라고 가정한다. 자기가 때리는 쪽이라고 가정한다. 자기가 쇠파이프를 드는 쪽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절대로 검증되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한 가지 실험을 제안한다.

청계산 사건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종업원의 위치에 놓아보자. 금요일 밤, 일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에 태워진다. 산속으로 끌려간다. 모르는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서 있다. 도망칠 수 없다.

이 상상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을 기억해두자.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힘의 세계에서는 강자만 안전하다. 그리고 영원한 강자는 없다.

이것을 350년 전에 정확히 꿰뚫어 본 사람이 있다. 다음 장에서 그를 만난다.


이상으로 1부를 마친다. 1부에서 우리는 힘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쇠파이프와 전기충격기. 스크린 속 정의와 현실의 괴리. 힘의 논리가 매력적인 심리학적 이유.

그러나 한 가지가 빠져 있다. 힘의 세계는 왜 지속 불가능한가. 힘 대신 무엇이 문명을 세웠는가. 2부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2부 — 문명의 발명: 취약함이 만든 세계

4장.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힘의 세계는 왜 지속 불가능한가


1651년, 영국. 내전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책을 썼다.

토머스 홉스. 철학자. 그는 왕당파였고, 프랑스에 망명 중이었다. 찰스 1세가 참수된 지 2년 뒤였다. 영국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왕이 죽고, 의회가 갈라지고, 군대가 서로를 죽였다.

홉스는 물었다. 법도 없고, 정부도 없고, 누구도 누구를 통제하지 않는 상태. 그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의 대답은 유명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법이 없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적이다. 내 것을 지킬 방법이 없으니,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합리적이다. 남이 나를 해칠 수 있으니, 먼저 해치는 것이 안전하다.

홉스는 그 삶을 다섯 단어로 요약했다.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잡하고, 잔인하고, 짧다."


홉스의 통찰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은 평등에 관한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놀랍도록 평등하다. 이것은 좋은 의미의 평등이 아니다. 죽일 수 있는 능력의 평등이다.

가장 강한 사람도 잠을 자야 한다. 잠든 사이에 약한 사람이 돌을 들 수 있다. 가장 강한 사람도 혼자서 열 명을 이길 수 없다. 약자들이 연합하면 어떤 강자도 쓰러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힘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김승연 회장이 쇠파이프를 동원했다. 그는 승리했다. 그 순간에는. 그러나 그는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았고, 특별사면이 필요했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보복 폭행"이라는 단어와 붙어 다닌다.

힘으로 이긴 사람이 진정으로 이긴 적이 있는가.


홉스가 그린 자연 상태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자.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경찰이 사라진다고 가정하자. 법원이 문을 닫는다. 계약은 종이 조각이 된다. 누군가 당신의 집에 들어와도 신고할 곳이 없다. 누군가 당신을 때려도 처벌할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다. 그러나 한 명이 움직이면 된다. 한 명이 이웃의 것을 빼앗으면, 다른 이웃은 방어 준비를 해야 한다. 방어 준비를 하는 것이 공격 준비로 보인다. 공포가 공포를 낳고, 무장이 무장을 낳는다.

이것이 홉스가 말한 "끊임없는 공포와 폭력적 죽음의 위험"이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도 전쟁 상태다.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 상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뒤, 해법을 제시했다.

자연법 제1법칙. "모든 인간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자연법 제2법칙.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내려놓을 용의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조건 하에."

핵심은 두 번째 법칙에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조건 하에." 나 혼자 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자살이다. 모두가 함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평화다. 이 차이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계약이고, 이를 집행하는 것이 국가다.

홉스는 이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 불렀다. 성경에 나오는 바다 괴물의 이름이다. 개인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 그래야만 개인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350년이 지난 지금, 홉스의 논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사람들이 공포를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했을 때,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법이 정지될 수 있다는 공포. 권력이 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공포. 350년 전 홉스가 묘사한 바로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공포.

힘의 세계는 매력적이다. 강자에게는. 잠시 동안은. 그러나 그 세계는 모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강자조차 불안하게 만든다. 가장 강한 사람도 잠을 자야 하니까.

그래서 인간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사회를 세우는 방법. 그 출발점에 하나의 자각이 있었다.

"나도 다칠 수 있다."


5장. "나도 다칠 수 있다"

문명의 첫 번째 자각


인간은 약하다.

이빨은 호랑이보다 작다. 발톱은 독수리보다 무디다. 피부는 코뿔소보다 얇다. 혼자서는 사슴 한 마리도 잡기 어렵다. 추위에 떨고, 더위에 쓰러지고, 작은 세균에 죽는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다. 이것이 문명의 시작이다.


경로를 따라가 보자.

인간은 다칠 수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 이웃에게 맞을 수 있다. 병에 걸릴 수 있다. 죽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첫 번째 자각이 일어난다.

"나도 다칠 수 있다."

이 자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다칠 수 있다."

나의 취약함을 인식하면, 타인의 취약함도 보인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 저 사람도 아프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공감의 출발이자, 협력의 출발이다.


혼자서는 맹수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함께 사냥했다. 함께 사냥하려면 약속이 필요했다. "네가 왼쪽에서 몰면 내가 오른쪽에서 찌른다." 이것이 규칙의 시작이다.

규칙이 생기면 어기는 사람이 나온다. 어기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법의 시작이다.

법을 집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국가의 시작이다.

취약함 → 협력 → 규칙 → 법 → 국가 → 문명.

이 경로의 맨 처음에 있는 것은 힘이 아니다. 약함이다.


17세기에 세 명의 철학자가 이 경로를 각각 다르게 설명했다.

토머스 홉스는 공포를 강조했다.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강력한 주권자에게 자기 권리를 양도한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다. 리바이어던이 태어난다.

존 로크는 권리를 강조했다.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세 가지 권리가 있다. 생명, 자유, 재산. 정부는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부가 이 권리를 침해하면? 시민은 저항할 수 있다.

장자크 루소는 평등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 사회가 커지면서 갈등이 생긴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합의한다. 이것이 일반의지다.

세 사람의 출발점은 달랐지만, 도착점은 같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함께 살려면 규칙이 필요하다. 규칙에 동의하는 것이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것이다.

"내가 당신을 해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해치지 마라."

이 문장은 단순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다. 양쪽 모두 "나도 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무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 계약에 동의할 이유가 없다. 내가 영원히 강하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권리를 내려놓을 이유가 없다.

사회계약은 취약한 존재들의 발명이다. 강한 존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문명의 규칙을 불편해한다. 법이 느리다고, 절차가 복잡하다고, 그냥 힘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다. 자기가 강한 것은 지금뿐이라는 것을. 내일은 모른다는 것을.


로크가 말한 자연권을 다시 보자. 생명, 자유, 재산.

이 세 가지는 도덕적 관념이 아니다. 실용적 계산이다.

내 생명이 보호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의 도구일 뿐이다. 내 재산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는 일할 이유가 없다.

이 세 가지를 지키려면 규칙이 필요하고, 규칙을 집행할 기관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다. 그래서 로크는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정부가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을 침해하면, 시민은 그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 논리는 미국 독립선언서에 그대로 들어갔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도 들어갔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들어 있다.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나도 다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규칙을 만들 때, 어떤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가. 강자에게 유리한 규칙? 약자에게 유리한 규칙? 아니면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규칙?

20세기에 한 철학자가 이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내놓았다. 그의 사고 실험은 간단하지만, 결론은 강력하다.

"내가 누구로 태어날지 모른다면, 어떤 규칙을 선택하겠는가?"


6장. 무지의 베일

내가 누구로 태어날지 모른다면


1971년, 하버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 존 롤스가 책 한 권을 펴냈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20세기 정치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롤스의 질문은 단순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떤 규칙이 필요한가.

그의 답은 하나의 사고 실험에서 출발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지금 태어나기 전이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모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 부자 집인지 가난한 집인지 모른다.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모른다. 건강한지 장애가 있는지 모른다. 똑똑한지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 단 하나도.

이 상태에서, 세상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 당신이 태어나서 살아갈 사회의 규칙을.

어떤 규칙을 만들겠는가?


롤스는 이것을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 불렀다. 베일 뒤에 서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자기의 인종, 성별, 재산, 능력, 취향, 종교, 모든 것이 가려진다.

이 사고 실험의 힘은 편향의 제거에 있다.

부자는 부자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고 싶다. 강자는 강자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고 싶다. 다수는 다수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고 싶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공정하지 않다.

무지의 베일은 이 편향을 원천 차단한다.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모르니까,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 내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모르니까, 약자도 보호받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 내가 다수인지 소수인지 모르니까, 소수도 존중받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


롤스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두 가지 원칙에 동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째, 자유의 원칙.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 자유를 보장한다.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신체의 자유. 이것은 양보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둘째, 차등의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허용된다. 단, 조건이 있다. 그 불평등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만.

두 번째 원칙이 중요하다. 롤스는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지 않았다.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평등이 바닥에 있는 사람의 삶도 나아지게 할 때만 정당하다.

예를 들어 보자. 의사가 일반 노동자보다 높은 소득을 받는 것은 허용된다. 높은 보수가 의학에 대한 투자를 유도하고,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하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의료 접근성도 높아진다면. 그러나 소수의 부가 다수의 빈곤 위에서 유지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닥에 있는 사람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 않으니까.


이 논증의 핵심을 다시 정리하자.

김승연 회장은 자기가 김승연인 것을 알고 있었다. 재벌 총수이고, 보디가드를 동원할 수 있고,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쇠파이프를 선택했다.

만약 그가 무지의 베일 뒤에 있었다면? 자기가 총수인지, 종업원인지 모르는 상태였다면? 그는 사적 보복이 허용되는 규칙을 선택했을까?

아니다. 합리적이라면 아니다. 내가 종업원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산속에 끌려가는 쪽일 수도 있으니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사적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규칙을 선택할 것이다. 법에 의한 해결. 공정한 재판. 폭력의 금지.

이것이 롤스의 결론이다. 법치와 인권은 도덕이 아니라 합리성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무지의 베일은 추상적인 철학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매일 경험한다.

교통 규칙을 생각해 보자. 빨간 불에 멈추는 것은 내가 보행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운전자이지만, 다음 순간에는 보행자일 수 있다. 이 불확실성이 규칙의 근거다.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자.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내가 언제 소수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수이지만, 사안에 따라 소수가 될 수 있다. 이 불확실성이 인권의 근거다.

모든 경우에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내가 어느 쪽이 될지 모른다." 이 인식이 공정한 규칙을 만든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홉스의 사회계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홉스는 말했다. 힘의 세계는 지속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가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존의 논리다.

롤스는 말했다. 국가가 있더라도, 규칙이 공정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 공정한 규칙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만 만들어진다. 이것은 정의의 논리다.

둘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나도 다칠 수 있다. 나도 약자일 수 있다. 나도 밑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

이 자각이 있는 사람은 공정한 규칙을 원한다. 이 자각이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규칙을 원한다.

여기까지는 머리로 이해하는 이야기다. 다음 장에서는 몸으로 배운 이야기를 하겠다. 물속에서.


7장. 버디 시스템

프리다이빙이 가르쳐준 문명의 원리


제주도 바다. 수심 15미터. 물은 차갑고 어두웠다.

나는 로프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 로프를 잡고, 한 번의 킥으로 1미터씩 하강했다. 귀 압력평형을 하면서.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수면 위에서 버디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은 정훈이었다. 그는 물속의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버디 시스템이다. 한 사람이 내려가면, 한 사람이 올라와 있는다. "One up, one down." 프리다이빙의 첫 번째 규칙이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블랙아웃이다.

블랙아웃은 의식 상실이다. 물속에서 산소가 부족해지면 뇌가 꺼진다. 경고 없이 일어난다. 수면 바로 아래에서도 일어난다. 수심 30미터에서 괜찮았던 사람이, 수면 3미터 앞에서 의식을 잃는다. 상승하면서 수압이 줄어들고, 폐 속 산소 분압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심해 블랙아웃이라 부른다. 10미터 이상 잠수한 뒤 수면에 가까워질 때 발생한다.

또 다른 종류가 있다. 얕은 물 블랙아웃. 잠수 전 과호흡을 하면, 혈중 이산화탄소가 낮아진다. 이산화탄소는 뇌에 "숨 쉬어라"고 신호를 보내는 물질이다. 이 신호가 약해지면, 몸이 산소 부족을 감지하지 못한다. 경고 없이 의식이 꺼진다.

블랙아웃의 무서운 점은 이것이다. 본인은 모른다. 의식을 잃는 순간, 자기가 의식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물속에서 의식을 잃으면, 누군가 건져주지 않는 한, 죽는다.


내가 블랙아웃을 경험한 것은 프리다이빙을 배운 지 6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수심 20미터를 목표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괜찮았다. 바닥을 찍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10미터 지점을 지날 때 시야가 좁아졌다. 터널처럼 가장자리가 어두워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킥이 느려졌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정훈이 말해주었다. 수면 2미터 아래에서 내 몸이 축 늘어졌다고. 그가 즉시 뛰어들었다고. 내 턱을 잡고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고. 기도를 확보하고, 얼굴에 바람을 불고, 이름을 불렀다고.

"탭, 블로우, 톡." 프리다이빙 응급 프로토콜이다. 두드리고, 불고, 말한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처음 본 것은 제주도 하늘이었다. 그리고 정훈의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프리다이빙을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는 프리다이빙이 개인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나의 폐활량, 나의 수심, 나의 기록. 전부 "나"에 관한 것이었다.

블랙아웃 이후에 깨달았다. 프리다이빙은 신뢰의 스포츠다.

내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수면 위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을 잃으면 건져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신뢰는 규칙에서 나온다. 규칙은 자각에서 나온다. "나도 의식을 잃을 수 있다." 이 한 문장이 모든 안전 시스템의 출발점이다.


프리다이빙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절대 혼자 다이빙하지 마라."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죽는다. 통계가 그것을 보여준다. 프리다이빙 사망 사고의 대다수는 버디 없이 혼자 잠수한 경우에 발생한다. "과로하고, 과중량이고, 감독이 부족한" 상태. 이것이 사망의 전형적 패턴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이 규칙들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생겼다. 의식을 잃고, 물속에서 숨을 쉬고, 폐에 물이 차고, 죽었다. 그 죽음들이 규칙을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문명과 같다고 생각한다.

법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생겼다. 살인이 있었으니 살인죄가 생겼다. 도둑이 있었으니 절도죄가 생겼다. 폭력이 있었으니 폭행죄가 생겼다. 모든 법 조항 뒤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있다.

헌법은 어디서 왔는가. 권력이 남용되었기 때문에 생겼다. 왕이 시민을 죽였으니 인권 조항이 생겼다. 정부가 언론을 탄압했으니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군인이 총을 들었으니 문민 통제가 생겼다.

모든 규칙은 취약함에서 태어났다.

프리다이빙에서는 이것이 명확하다. 내가 의식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버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혼자 들어간다. 혼자 들어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문명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이 법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법을 무시한다. 법이 무시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2부를 정리하자.

홉스는 말했다. 힘의 세계는 지속 불가능하다. 모두가 불안하다.

사회계약론자들은 말했다. 인간은 취약하기에 계약을 맺는다. 권리를 나누고 규칙을 세운다.

롤스는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가장 공정한 규칙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는 배웠다. 내가 의식을 잃을 수 있다는 자각이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이 더 깊은 잠수를 가능하게 한다.

문명은 취약함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약점이 아니다. 이것이 기초다.

그런데 이 기초를 잊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3부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


3부 — 망각의 시대: 문명은 왜 스스로를 파괴하는가

8장. 공기처럼 당연한 것들

문명의 역설


공기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숨을 쉬면서 "아, 공기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공기가 사라질 때만 공기를 생각한다.

문명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난다. 수돗물이 나온다. 당연하다. 전기가 들어온다. 당연하다.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하철을 탄다. 직장에 간다. 월급을 받는다. 은행에 넣는다. 그 돈이 내일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하다.

이 모든 "당연한 것들" 뒤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

수도관이 있다. 누군가 매설했고, 누군가 관리한다. 발전소가 있다. 누군가 운영하고, 누군가 감독한다. 경찰이 있다. 밤새 순찰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법원이 있다. 계약을 집행하고, 분쟁을 해결한다. 중앙은행이 있다. 화폐 가치를 유지하고, 인플레이션을 관리한다.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할수록, 우리는 그 존재를 잊는다. 이것이 문명의 역설이다.


한 전문가가 이렇게 말했다. "인프라는 잘 작동할 때 보이지 않는 조연이다. 조용히 배경에서 작동하며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말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 말 안에 위험이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감사받지 못한다. 감사받지 못하는 것은 유지되지 않는다. 유지되지 않는 것은 무너진다.


역사에서 이 패턴은 반복되었다.

로마제국을 보자. 2세기, 로마는 번성했다. 도로가 제국을 연결했다. 수도관이 물을 공급했다. 법이 시민을 보호했다. 군대가 국경을 지켰다. 로마 시민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코모두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경제와 군사를 물려받았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는 검투사가 되고 싶었다. 스스로를 헤라클레스라 불렀다. 원로원을 무시했다. 행정을 방치했다.

제국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다. 시스템이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균열은 시작되었다. 코모두스는 암살당했고, 그 후 제국은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명 연구자들이 발견한 패턴이 있다. "모든 연구 사례에서 붕괴 초기 단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제도적 실패다. 무능, 경제 네트워크 상실, 부패, 지도층의 위기."

문명은 외부의 침략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의 망각으로 무너진다.


현대 사회에서 이 망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인력 교체. 사람들이 자주 이직한다. 조직에 쌓인 경험과 지식이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왜 이 규칙이 만들어졌는지, 왜 이 절차가 필요한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떠나면 규칙은 의미를 잃는다. 형식만 남는다.

둘째, 주의력 경쟁. 새로운 정보와 과제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점검하는 일은 긴급하지 않다. 긴급하지 않은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밀리고 밀리다가, 무너진다.

셋째, 리더십 전환. 새로운 지도자가 오면, 이전 지도자의 정책과 사람들이 제거된다. 공로와 무관하게. 정치적 이유로. 이것은 조직에서도,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자.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했다. 언론 통제가 선언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계엄이 맞지. 나라가 이 꼴인데."

이 반응 안에 문명의 역설이 응축되어 있다.

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 때문이다. 계엄을 옹호하는 글을 카카오톡에 보낼 수 있는 것은 표현의 자유 때문이다. 아무런 보복 없이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있는 것은 법치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공기를 마시면서, 민주주의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 이것이 문명의 역설이 만든 가장 위험한 존재다.


계단 비유가 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마지막 한 칸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바닥이었던 적이 있는가. 발이 허공을 밟는 그 순간의 충격. 있다고 믿었던 것이 없을 때의 당혹감.

문명이 무너지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있다고 믿었던 것이 갑자기 없어진다.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안 나온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아무도 안 온다. 은행에 갔는데 돈이 사라져 있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당연한 것은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다.

그래서 질문해야 한다. 지금. 이 시스템이 왜 만들어졌는지. 이 규칙이 왜 필요한지. 이 자유가 어디서 왔는지.

질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


9장.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들

엘리트와 파시즘의 씨앗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유치원 때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에서도 1등이었다. 특목고에 갔다. 서울대에 합격했다. 대기업에 입사했다. 승진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이 사람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노력하면 된다." 이 사람은 이 문장을 진심으로 믿는다. 자기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공부했더니 성적이 올랐다. 일했더니 승진했다.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다. 세상은 공정하다. 능력이 곧 결과다.

이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 사람의 경험 안에서는. 문제는 이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2019년, 예일대 법학교수 대니얼 마코비츠가 《능력주의의 함정》을 출간했다.

그의 주장은 도발적이었다. 능력주의는 실패했다. 능력주의가 약속한 것 — 능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 — 은 환상이다.

왜 환상인가.

부모가 부유하면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과외, 더 좋은 환경. 이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원'이다. 그러나 결과는 '능력'으로 포장된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그것은 그 학생이 '뛰어나서'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그 학생의 부모가 뛰어난 자원을 가졌기 때문인데.

마코비츠는 이것을 증명했다. 부모의 양육과 교육 시스템이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쌓여 있다. 중산층 자녀는 엘리트 교육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엘리트 교육 없이는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다.

능력주의의 승자들은 이것을 모른다. 자기가 이긴 게임의 규칙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자기 능력으로 이겼다고 믿는다. 진심으로.


이것이 왜 위험한가.

자기가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믿는다.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세상이 공정하고, 능력이 결과를 결정한다면,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다.

이 논리 안에서 복지는 불필요하다. 약자 보호는 불필요하다. 재분배는 불공정하다. 내가 번 것은 내 능력의 결과인데, 왜 남에게 나눠야 하는가.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은 지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모른다. 시스템에 의해 밀려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벽에 부딪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 사람은 지식이 풍부하다. 분석력이 뛰어나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패배의 감각. 취약함의 자각. "나도 밑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는 상상력.


고등 교육은 지식을 준다. 비판적 사고를 훈련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주어진 문제를 빠르게 푸는 능력이다. 정해진 답을 효율적으로 찾는 능력이다.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는 능력은 가르치지 않는다. 시스템이 왜 존재하는지 묻는 능력은 가르치지 않는다.

왜 가르치지 않는가. 시스템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시스템에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 보상받는 구조에서, 의심하는 근육은 퇴화한다.


파시즘의 씨앗은 여기서 싹튼다.

파시즘은 무식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의 관료들은 고학력자였다. 아이히만은 유능한 행정가였다. 홀로코스트의 기계를 설계하고 운영한 사람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고 한 말이 있다. "소름끼칠 정도로 정상적인 사람." 변태도 아니고, 가학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관료. 나치 관료제에서 성실하게 출세하는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던 사람.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악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양복을 입고, 서류를 정리하고, 상사의 지시를 따르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온다.

핵심은 "사고의 부재"다. 생각하지 않음.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묻지 않음.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그 시스템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 질문하지 않음.


권위주의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이 있다.

"실수를 인정하고 교정하지 못하는 것이 권위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민주주의의 실패는 항상 보인다. 언론이 보도하고, 시민이 비판하고, 선거가 심판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저분해 보인다. 문제가 눈에 띄니까.

권위주의의 실패는 보이지 않는다. 언론이 통제되고, 비판이 금지되고, 선거가 없거나 형식적이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효율적으로 보인다. 문제가 숨겨지니까.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들은 효율에 끌린다. 깔끔함에 끌린다. 민주주의의 시끄럽고 느린 절차에 짜증을 낸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걸 왜 저렇게 복잡하게 하나." 이 짜증이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로 이어진다.

그들은 한 가지를 모른다. 절차가 복잡한 이유는 누군가 그 절차 없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스템이 느린 이유는 빠른 시스템이 누군가를 짓밟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 파시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사람들은 파시즘이 자라는 토양을 인식하지 못한다. 파시즘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보아도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항상 자기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 맹점이 위험하다. 가장 교육받은 사람들이 가장 큰 맹점을 가질 수 있다는 역설. 이것이 다음 장의 이야기다.


10장. "서울대가 파시스트를 만든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의 탄생


도발적인 제목이다. 해명이 필요하다.

서울대가 직접 파시스트를 양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 가장 큰 보상을 받는 구조.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특정한 유형의 인간.

정답을 빨리 찾는 인간. 질문하지 않는 인간.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한국이 멈춘다.

수능. 대학수학능력시험. 비행기가 이착륙을 멈춘다. 영어 듣기평가 때문이다.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이 조정된다. 수험생의 교통을 위해서다. 경찰이 수험생을 오토바이로 호송한다. 시험장에 늦지 않도록.

한 나라 전체가 하루 동안 하나의 시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의식이다. 종교적 의식에 가깝다.

이 시험을 위해 한국의 학생들은 12년을 준비한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 12년의 본질은 하나다. 정해진 답을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찾는 훈련.


학원이 있다. 학원은 한국 교육 문화의 가장 독특한 요소다. 사교육 기관.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간다.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에 간다. 독서실이 닫히면 집에 가서 또 공부한다.

한국의 학업 압박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평가된다. 학생들은 과잉 성취한다. 그 대가는 건강과 행복이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인간은 우수하다. 시험에서 우수하다. 분석에서 우수하다. 실행에서 우수하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있다. 문제 자체를 의심하는 능력. "이 문제가 맞는 문제인가?"를 묻는 능력. "이 시스템이 정당한가?"를 질문하는 능력.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SKY. 한국 사회의 최상위 학벌이다.

기업의 절반 이상이 채용 과정에서 학력을 고려한다. 학력이 능력을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SKY 출신은 기회를 얻는다. 지방대 출신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것은 통계적 사실이다.

이 구조가 만드는 것은 엘리트가 아니다. 순응자다.

12년간 시스템이 제시한 목표를 따라왔다. 초등학교 성적, 중학교 내신, 고등학교 모의고사, 수능, 대학 입학. 목표는 항상 외부에서 주어졌다. 목표를 달성하면 보상받았다. 칭찬, 합격, 취업, 연봉.

이 과정에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이 시스템이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지. 이 경쟁이 정말 필요한지.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물어보면 뒤처졌다. 물어보는 것은 비효율이었다. 답을 찾는 것이 효율이었다.


SKY에 입학한 학생은 한국 사회의 승자다. 시스템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시스템은 공정하다. 노력에 따른 보상이 명확하다. 이 사람이 시스템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은 다르다.

지방에서 태어나 학원 한 번 다니지 못한 학생. 부모가 맞벌이라 혼자 공부한 학생.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학생. 이들에게 수능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출발선이 다른 달리기다.

SKY 출신은 이것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자기와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왜 파시즘과 연결되는가.

파시즘은 복잡성의 거부다. 세상은 복잡하다. 문제에는 여러 원인이 있고, 해법에는 여러 관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이 복잡성을 수용한다. 토론하고, 타협하고, 천천히 움직인다.

파시즘은 이 복잡성을 거부한다. 문제는 하나다. 적이 있다. 적을 제거하면 해결된다. 빠르고, 깔끔하고, 효율적이다.

12년간 정답 찾기 훈련을 받은 인간에게, 세상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자연스럽다. 복잡한 사회 문제에도 하나의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간명한 해법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를 의심하지 않고, 시스템을 질문하지 않고, 주어진 틀 안에서 답을 찾는 데 최적화된 사람. 이 사람에게 "강한 지도자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정답이 있다. 누군가 그것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을 따르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대 졸업생이 파시스트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의 최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많다. 문제는 교육 시스템 자체가 그 성찰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찰은 개인의 노력으로 도달한 것이다. 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다. 시스템은 오히려 성찰을 방해한다. 답을 찾으라고 재촉하면서.

지식은 많은데 성찰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시스템이 흔들릴 때 가장 취약하다. 정답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답을 제시하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정답인지 따지지 않고 따르기 쉽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약자의 편에 서기보다 강자의 편에 서는 이유가 있다. 다음 장에서 그 이유를 파본다.


11장. 일시적으로 곤란한 미래의 부자들

약자가 강자를 옹호하는 이유


1961년 8월. 예일대학교.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실험을 시작했다. 석 달 전, 예루살렘에서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주요 기획자 중 한 명이었다. 수백만 명의 죽음을 관리한 관료.

아이히만의 변호는 간단했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밀그램은 묻고 싶었다. 평범한 사람도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는가.


실험의 구조는 이랬다.

뉴헤이븐에서 남성을 모집했다. 20세에서 50세. 다양한 직업. 참가비 4달러 50센트. 그들에게 말했다. 이 실험은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참가자는 "교사" 역할을 맡았다. 옆방에 "학습자"가 있었다. 학습자가 문제를 틀리면, 교사는 전기충격을 가해야 했다. 15볼트에서 시작해서,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올렸다. 최대 450볼트.

학습자는 배우였다. 실제 전기충격은 없었다. 그러나 교사는 그것을 몰랐다. 학습자는 고통스러운 연기를 했다.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실험을 멈춰달라고 간청했다. 300볼트 이후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교사가 망설이면, 실험자가 말했다. "계속하세요." "실험을 위해 필요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밀그램과 그의 학생들은 예측했다. 참가자의 1~3%만이 최대 전압까지 갈 것이라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가 450볼트까지 집행했다.

모든 참가자가 300볼트까지는 진행했다. 옆방에서 비명이 들리는데도. 심장이 아프다는 호소가 들리는데도. 침묵이 내려앉은 후에도.

참가자들은 불편해했다. 땀을 흘리고, 입술을 깨물고, 멈춰달라고 간청하면서도 — 버튼을 눌렀다. 권위자가 "계속하세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변형 실험이 실시되었다.

장소를 예일대에서 뒷골목 사무실로 옮겼다. 복종률이 65%에서 47%로 떨어졌다. 권위의 배경이 사라지자 복종이 줄었다.

실험자가 실험복 대신 평복을 입었다. 복종률이 20%로 떨어졌다. 권위의 외양이 사라지자 더 줄었다.

다른 교사 두 명이 먼저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복종률이 10%로 떨어졌다. 40명 중 4명만이 끝까지 갔다.

밀그램의 결론. "성인이 권위의 명령에 따라 거의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극단적 의지. 이것이 이 연구의 핵심 발견이며, 가장 시급하게 설명이 필요한 사실이다."


밀그램 실험은 왜 약자가 강자를 옹호하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축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다른 축이 있다. 심리학에서 "공격자 동일시"라 부르는 현상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처음 제안하고, 딸 안나 프로이트가 발전시킨 개념이다. 피해자가 무의식적으로 가해자의 특성을 채택하는 방어기제.

논리는 이렇다. 나는 약하다. 약하다는 것은 위험하다. 강한 쪽에 서면 안전하다. 강한 쪽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내가 강한 쪽이 된 것 같다. 실제로 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 느낌이 공포를 줄여준다.

"권력과 착취에 노출됨으로써, 약자는 강자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이것이 김승연의 보복 폭행을 "시원하다"고 말한 사람들 안에서 작동한 메커니즘이다. 그들은 김승연이 아니다. 총수도 아니고, 보디가드를 부를 힘도 없다. 그러나 김승연에게 자기를 투영함으로써, 잠시 동안 그 힘을 빌려 입는다.


존 스타인벡이 1960년에 쓴 글이 있다.

"내가 만난 이른바 공산주의자들 대부분은 중산층, 중년의 사람들로, 꿈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라고 자인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곤란한 자본가였다."

이 문장은 나중에 변형되었다. 2004년, 캐나다 작가 로널드 라이트가 이렇게 바꿔 썼다. "사회주의가 미국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를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곤란한 백만장자로 보기 때문이다."

원문과 변형본의 뉘앙스는 다르다. 그러나 핵심은 같다. 사람들은 자기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이 메커니즘들을 종합하면 그림이 보인다.

밀그램 실험: 사람들은 권위에 복종한다. 권위자가 시키면, 자기 판단을 내려놓는다.

공격자 동일시: 약자는 강자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그것이 공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일시적 곤란의 환상: 자기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라는 환상에 기대어 강자의 세계관을 빌려 입는다.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약자가 강자를 옹호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재벌의 편을 드는 직장인. 계엄을 옹호하는 시민. 사적 폭력에 환호하는 관객.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무서운 것이다. 자기가 쇠파이프 앞에 서는 쪽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관료였다. 그의 악은 "사고의 부재"에서 왔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했다. 효율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것. 강자에게 동일시하는 것. 자기가 약자임을 부정하는 것. 질문하지 않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취약함의 부정. "나도 다칠 수 있다"는 자각의 부재.

3부를 마치며 정리하자.

문명은 취약함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문명이 성공하면, 취약함을 잊는다. 시스템이 당연해지고, 엘리트는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고, 대중은 강자에게 자기를 투영한다. 이것이 망각의 시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4부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4부 — 저항과 지킴: 문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방식

12장. 식탁의 침묵, 광장의 함성

싸울 전장을 선택한다는 것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텔레비전 화면에 대통령이 나타났다.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북한 공산세력"과 "반국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야당을 "반국가... 범죄자 소굴"이라 불렀다.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언론이 통제되었다. 경찰이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무장한 군인 수십 명이 국회 건물에 진입했다.

1980년 이후 44년 만의 계엄이었다.


사람들은 움직였다.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달려갔다. 담을 넘은 의원도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간 의원도 있었다. 군인들이 막는 것을 뚫고 본회의장에 모였다.

12월 4일 새벽 1시 2분. 국회의원 190명이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육군특수전사령부가 의결을 방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새벽 4시 30분. 대통령과 내각이 계엄을 해제했다.

계엄은 6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시민들도 움직였다. 추운 12월 밤, 국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뉴스를 보고 나왔다. 소셜 미디어를 보고 나왔다. 옆 사람에게 연락받고 나왔다.

12월 14일,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했다. 국민의힘 소속 12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계엄과 탄핵. 이 사건에서 나는 두 가지를 본다.

첫째, 문명은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누군가 행동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지 않았다면, 시민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여당 의원 12명이 당론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계엄은 유지되었을 수 있다.

둘째,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 담을 넘은 의원이 있었고, 광장에 선 시민이 있었고, 찬성표를 던진 여당 의원이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프롤로그에서 나는 가족 단톡방을 나왔다고 썼다.

그것은 도망이었을까. 비겁이었을까.

오래 생각했다. 답은 이렇다. 모든 전투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가족 단톡방에서 논쟁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이길 수 없는 전투다. 상대가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저항이 아니다. 자기 파괴다.

침묵이 동의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침묵이 전략인 경우도 있다. 이길 수 없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서야 할 자리에서 서는 것. 이것은 같은 원칙의 다른 표현이다.

가족 단톡방을 나온 것과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든 것은 모순이 아니다. 전장을 선택한 것이다.


비폭력 저항 연구에 유명한 통계가 있다.

1900년부터 2006년까지, 비폭력 저항 운동은 폭력적 저항보다 2배 이상 효과적이었다. 목표를 달성하는 비율이 두 배가 넘었다.

왜 그런가. 비폭력 운동은 정당성을 얻기 쉽다. 더 넓은 지지를 끌어낸다. 상대편 보안군을 무력화한다. 상대 지지자들의 이탈을 촉진한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감정적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고도로 전략적인 행위자"였다. 그는 어떤 행진을, 어떤 장소에서, 어떤 타이밍에 할지를 계산했다. 카메라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았다. 폭력적 진압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았다.

간디의 1930년 소금 행진도 마찬가지다. 소금에 대한 영국의 세금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징으로서는 강력했다. 인도인이 자기 땅의 소금을 만들 권리. 이 간단한 행위가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온 세계에 보여주었다.

전략적 저항이다. 모든 부당함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지점을 선택하여 행동하는 것.


그렇다면 일상에서 전장의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직장에서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린다. 싸울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이다. 그러나 기준은 있다.

이 싸움이 이길 수 있는가. 이 싸움이 나만의 문제인가, 여러 사람의 문제인가. 이 싸움에서 내가 지불할 비용은 감당 가능한가. 이 싸움에서 물러서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기는가.

모든 질문에 "예"라면, 싸운다.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다른 방법을 찾는다. 기록을 남긴다. 동지를 찾는다. 더 나은 타이밍을 기다린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다. 전략이다. 문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전투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전장을 고른다.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로 달려간 의원들은 전장을 선택했다.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은 전장을 선택했다. 당론을 거부한 12명의 여당 의원은 전장을 선택했다.

그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원칙을 지켰다. 힘이 법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군화가 투표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그러나 싸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다. 문명을 위협하는 것은 계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화면 속에서, 다른 종류의 위협이 작동하고 있다.


13장. "누가 더 나쁜 놈인가" 게임을 거부한다

혐오의 재생산에서 벗어나기


스마트폰을 열어보자.

뉴스 앱을 연다. 헤드라인이 보인다. 분노를 자극하는 제목들. "충격", "경악", "분노". 클릭한다. 기사를 읽는다. 화가 난다. 댓글을 본다. 더 화가 난다. 다른 기사를 클릭한다. 더 자극적인 제목. 더 강한 분노.

30분이 지났다. 얻은 것은 없다. 기분만 나빠졌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설계된 것이다.


"분노 산업 복합체"라는 말이 있다.

미디어, 인플루언서, 정치 모금, 개인 방송이 결합된 시스템이다. 차이를 갈등으로 만든다. 갈등을 분노로 만든다. 분노를 클릭으로 만든다.

미디어는 분노를 조장할 인센티브가 있다. 분노가 페이지뷰를 올리고, 공유를 늘리고, 댓글을 늘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돈이 된다.

소셜 미디어의 비즈니스 모델은 인게이지먼트에 기반한다. 인게이지먼트란 당신이 화면을 보는 시간이다. 당신이 화면을 오래 볼수록 광고가 더 많이 노출된다. 광고가 노출될수록 플랫폼이 돈을 번다.

무엇이 화면을 오래 보게 만드는가. 분노다. 공포다. 혐오다.


알고리즘이 이것을 증폭한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선동적 콘텐츠에 특권을 부여"한다. 반응이 많은 게시물이 더 많이 노출된다. 분노를 유발하는 게시물은 반응이 많다. 그래서 더 많이 노출된다. 더 많이 노출되면 더 많은 분노를 낳는다.

이것이 반복된다. 분노가 시청 시간을 늘린다. 시청 시간이 광고 수익을 올린다. 알고리즘은 분노에 보상을 준다.

구글의 기술 윤리학자였던 트리스탄 해리스는 이것을 이렇게 불렀다. "뇌간을 향한 경주."

뇌간은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이다. 공포, 분노, 도피 반응을 관장한다. 소셜 미디어 기업들은 당신의 이성이 아니라 뇌간을 겨냥한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게 만든다.


이 시스템 안에서 정치적 콘텐츠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쪽이 더 나쁘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인게이지먼트 동력이다. 나와 다른 편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보여주는 콘텐츠. 상대방의 최악의 모습을 확대하는 콘텐츠.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콘텐츠.

이것을 나는 "누가 더 나쁜 놈인가" 게임이라 부른다.

이 게임에는 끝이 없다. 한쪽이 분노하면 다른 쪽이 더 분노한다. 분노가 분노를 낳고, 혐오가 혐오를 낳는다. 게임이 계속될수록 양쪽 다 더 극단적이 된다. 중간 지대가 사라진다.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어느 쪽도 아니다. 플랫폼이 이긴다. 당신의 시간과 주의력을 팔아 돈을 벌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 기업은 소프트웨어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을 판다. 당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영향력을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한다.

당신은 사용자가 아니다. 상품이다.

이것을 아는 것과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고리즘은 당신의 앎보다 강하다. 뇌간은 이성보다 빠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더 나쁜 놈인가" 게임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다. 분노의 산업에 원료를 공급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의 출처를 확인한다. 이 콘텐츠가 나의 판단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나의 감정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전자라면 읽는다. 후자라면 닫는다.

둘째, 반응하기 전에 멈춘다. 분노를 느끼는 순간, 3초를 기다린다. 이 3초가 뇌간과 전두엽의 차이다. 반응과 판단의 차이다.

셋째, 소비량을 제한한다. 정치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 하루 중 특정 시간만 할애한다. 나머지 시간은 차단한다. 알고리즘은 무한한 시간을 원하지만, 당신의 시간은 유한하다.

넷째, 오프라인에서 대화한다. 화면 속 논쟁은 상대를 추상화한다.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으로 환원한다. 얼굴을 보며 하는 대화는 다르다.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혐오의 재생산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시스템 전체가 당신을 그 안에 가두려 한다. 알고리즘이, 헤드라인이, 알림이, 끊임없이 당신의 뇌간을 두드린다.

그러나 가능하다. 밀그램의 변형 실험을 기억하자. 다른 교사 두 명이 먼저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복종률은 65%에서 10%로 떨어졌다. 누군가 먼저 거부하면, 다른 사람도 거부할 수 있다.

"누가 더 나쁜 놈인가" 게임을 거부하는 것. 분노의 원료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 이것은 작은 행동이지만, 문명을 지키는 행동이다.

그리고 문명을 지키는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다.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한다.


14장. 내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문명을 지키는 일상의 실천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 홉스와 롤스. 밀그램 실험. 계엄과 탄핵. 알고리즘과 분노 산업.

이제 작은 이야기를 하자.


문명은 한 번의 거대한 전투로 지켜지지 않는다. 무수한 개인의 무수한 선택으로 유지된다.

매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사소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그 결정들의 총합이 문명이다.


투표.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그리고 가장 과소평가되는 행위다.

"내 한 표가 뭘 바꾸겠어." 이 말은 틀렸다. 한 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백만 표는 바꾼다. 그 백만 표는 한 표가 백만 번 모인 것이다.

투표는 선택이 아니다. 유지 보수다. 수도관을 점검하고, 전기 배선을 확인하고, 지붕에 새는 곳이 없는지 살피는 것과 같다. 화려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집이 무너진다.

지방 선거가 특히 중요하다. 대통령 선거에는 관심이 쏠리지만, 실제로 일상을 바꾸는 것은 지역 정치다. 우리 동네의 학교, 병원, 도로, 치안. 이것을 결정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지방 선거다.

정보에 기반한 투표를 한다. 후보의 공약을 읽는다. 실현 가능성을 따진다. 이것은 30분이면 된다. 4년에 한 번, 30분. 이 정도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정치가 나빠서"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가르침.

아이가 있다면, 이야기를 하자.

왜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지. 왜 줄을 서야 하는지. 왜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이 질문들의 답은 모두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너도 맞으면 아프잖아." "너도 새치기당하면 싫잖아." "너도 약속이 깨지면 속상하잖아."

취약함의 상호 인식. 이것이 문명의 출발이라고 이 책은 말해왔다. 아이에게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문명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행위다.

아이가 없어도 마찬가지다. 후배에게, 동료에게, 주변 사람에게. "왜 이 규칙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것. 이것이 조직의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8장에서 말한 조직의 기억 상실을 막는 방법이다.


목소리.

부당한 일이 보이면 말한다. 모든 부당함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12장에서 말했다. 전장을 선택하라고. 그러나 선택한 전장에서는 말한다.

직장에서 부당한 지시가 내려졌다. 기록한다. 동료와 이야기한다. 필요하면 공식 채널에 제기한다. 이것은 영웅적 행위가 아니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다. 법이 있고, 규정이 있고, 절차가 있다. 이것들은 쓰라고 만든 것이다.

온라인에서 혐오 발언을 본다. 신고한다. 반박하지 않아도 된다. 반박은 오히려 알고리즘에 먹이를 줄 수 있다. 신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선거에서 부정이 의심된다. 감시한다. 시민의 감시는 민주주의의 필수 기능이다.


원칙.

작은 것에서 원칙을 지킨다.

새치기를 하지 않는다. 약속을 지킨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빚을 갚는다. 쓰레기를 줍는다.

이것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사회 계약의 실천이다. 내가 규칙을 지키면, 주변 사람도 규칙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밀그램 실험의 반대다. 누군가 거부하면 다른 사람도 거부할 수 있다. 누군가 원칙을 지키면 다른 사람도 원칙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쌓이면 사회가 된다. 이것이 무너지면 야만이 된다.


관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 동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 학교에서 무슨 결정이 내려지는지. 우리 회사에서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나와 상관없는 일"은 생각보다 적다. 동네의 재개발은 내 집값에 영향을 미친다. 학교의 급식 정책은 내 아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회사의 인사 정책은 내 동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시민 참여는 거대한 시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민 회의에 참석하는 것. 학교 운영위원회에 의견을 내는 것. 공청회에 가는 것. 이런 작은 참여가 민주주의의 실체다.

"시민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참여가 상당한 수준으로 없이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

이 문장은 추상적으로 들린다. 구체적으로 바꾸면 이렇다. 당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 대신 결정한다. 그 결정이 당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일이다.

투표하는 것.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 부당함에 말하는 것. 원칙을 지키는 것. 주변에 관심을 갖는 것.

영웅적이지 않다. 드라마틱하지 않다.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문명이다. 문명은 영웅의 작품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선택이 만드는 것이다.

수도관을 매설한 사람의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하수도를 설계한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 전봇대를 세운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투표한 사람의 이름을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킨 사람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4부를 마친다.

전장을 선택하라. 혐오의 게임을 거부하라. 내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문명을 지켜라.

이것이 이 책이 제안하는 답이다. 거창하지 않다. 식탁에서 시작된 질문에 대한, 식탁으로 돌아가는 답이다.


에필로그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삶을 만든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오늘 내 몸 상태는 어떤가. 수면 위 컨디션은 어떤가. 물의 온도는. 조류는. 버디의 준비 상태는.

이 모든 것을 점검한 뒤에야 물에 들어간다. 그리고 물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확인한다. 이상이 느껴지면 다이빙을 중단한다. 내일 다시 들어가면 된다. 오늘 무리하면 내일이 없을 수 있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깊은 잠수를 가능하게 한다. 역설이다.


이 책은 하나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삶을 만든다.

다칠 수 있다는 인정이 안전을 만든다. 약할 수 있다는 자각이 규칙을 만든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이 공정함을 만든다.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문명을 세웠다. 취약함을 부정하는 오만이 문명을 무너뜨린다.


이 책에서 만난 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김승연은 자기가 취약하지 않다고 믿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쇠파이프를 들었다.

밀그램 실험의 참가자들은 권위에 복종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았다. 버튼을 눌렀다.

아이히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했다. 성실하게.

반대편에는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홉스는 내전의 한가운데서 질문했다. 왜 인간은 서로를 죽이는가. 그리고 답을 찾았다. 우리 모두가 취약하기 때문에, 계약이 필요하다.

롤스는 사고 실험을 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떤 규칙을 선택하겠는가. 그리고 답을 찾았다. 가장 약한 사람도 보호받는 규칙을.

2024년 12월 밤, 국회로 달려간 의원들이 있었다. 광장에 선 시민들이 있었다. 당론을 거부한 의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투표하고, 가치를 가르치고,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고, 원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프롤로그에서 나는 가족 단톡방을 나왔다고 썼다. 명절 식탁에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고 썼다.

그 후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많은 것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결론은 단순하다.

나는 김승연이 아니다. 그 힘이 없다. 그러나 김승연의 세계에 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힘이 정의를 대신하는 세계. 강자만 안전한 세계. 가장 강한 사람도 잠을 못 자는 세계.

나는 취약한 존재다. 다칠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한다. 이 인정이 출발이다.

그리고 나는 내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물속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나를 건져준 것은 버디였다. 정훈이었다. 그는 규칙을 지켰다. "One up, one down." 내가 내려가면 그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올라오지 않으면 그가 뛰어들었다.

나도 그에게 같은 것을 한다. 그가 내려가면 내가 지켜본다. 그가 올라오지 않으면 내가 뛰어든다.

이것이 문명이다. 서로가 서로의 버디가 되는 것. 내가 쓰러지면 누군가 일으켜줄 것이라는 신뢰. 누군가 쓰러지면 내가 일으켜줄 것이라는 약속.

이 신뢰와 약속이 지켜지는 한,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삶을 만든다.


부록


1. 한화 김승연 청계산 보복폭행 사건 타임라인

시기 사건
2007년 3월 김승연 회장의 둘째 아들, 서울 청담동 유흥업소에서 종업원들에게 폭행당함
2007년 3월 김승연 회장, 경호원을 동원하여 종업원 8명을 청계산으로 끌고 가 쇠파이프·전기충격기로 보복 폭행
2007년 감금, 폭행, 협박 혐의로 기소
2007년 1심 재판: 징역 4년 선고
2008년 항소심: 집행유예로 감형
2008년 8·15 대통령 특별사면
이후 한화그룹 회장직 복귀, 경영 활동 재개

2. 영화 《베테랑》 실화 모티브 정리

영화 정보

실화 모티브

《베테랑》의 조태오 캐릭터는 특정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재벌 관련 사건들의 복합적 모티브로 구성되었다.

감독 류승완의 언급: "개별 사건보다, 이런 사건이 계속 반복되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에 주목했다."


3. 2024년 12월 계엄 사태 경과

날짜/시간 사건
12월 3일 22:27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TV 생중계)
12월 3일 22:30~ 경찰, 국회 정문 봉쇄. 무장 군인 수십 명 국회 진입
12월 3일 23:00~ 국회의원들 국회 집결 시작. 일부 의원 담장 넘어 진입
12월 3일 심야 시민들 국회 앞 운집
12월 4일 01:02 국회의원 190명 만장일치 계엄 해제 의결
12월 4일 04:30 대통령과 내각, 계엄 해제
12월 7일 1차 탄핵 표결: 부결 (국민의힘 보이콧)
12월 14일 2차 탄핵 표결: 가결 (국민의힘 12명 찬성). 대통령 직무 정지
12월 27일 한덕수 국무총리 대행 탄핵. 최상목 부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승계

역사적 맥락: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쿠데타 이후 44년 만의 계엄 선포.


4. 참고문헌

철학·정치사상

사회과학·심리학

저항·시민사회

기술·미디어

기사·보도

인용 원전


판권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이 삶을 만든다

— 문명은 왜 취약함 위에 세워졌는가

초판 1쇄 발행 2026년 2월
지은이 일벌
펴낸곳 독립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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